“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하는지가 중요하다”

초선이지만 절대 초선답지 않은, 50대이지만 전혀 50대처럼 보이지 않는 경기도의회 박근철(민주당·비례) 의원이 자신의 명함에 새겨 놓은 문구이다.

경기도 출신이 아니라 도내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할 당시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박 의원은 좌절 대신 오뚜기가 돼 도전하고 다시 도전해 도의회에 입성했다.

의정활동은 비록 3년차인 초선 의원이지만 정치에 발을 담근지는 벌써 30여년에 가까워진 박 의원은 “내 아무리 혼자 잘해봐야 혼자만 즐겁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더불어 같이 나가야 즐겁고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강원도 출신으로 경기도 광역의원 자리에 오르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겪어온 박 의원을 중부일보가 만나봤다.



-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오게된 계기가 있었나.

“80년대 강원대학교를 다녔을 당시 학생회장 출신이라 학생운동도 많이 하면서 세상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열린거 같다. 수배도 많이 당해보고 도망도 다녀봤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럭키화학에 입사해 일을 했으나 주변 선후배들이 나와 맞지 않는 일 같다고 만류를 해 오래다니진 못했다. 그 시기가 지방자치가 시작될 무렵이다. 1995년도에 나와 학생운동을 같이 하던 친구가 기초단체장 선거에 출마를 했다. 아쉽게 100표 차로 지긴 했지만 지고나니 경찰에도 끌려가고 검찰에도 끌려가고 그랬다. 아무런 문제 없이 끝이 나긴 했지만 그 땐 금전적인 문제가 많이 걸려있다 보니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조사를 받았었다. 그 때 이후로 고향을 떠나 처형이 살고 있던 의왕으로 올라오게 됐다. 23년 정도 된거 같다.



- 도의원 선거 출마는 어땟나.

”경기도로 거주지를 옮기고 나서도 강원대 출신이다 보니 고향 선후배들의 요청으로 2004년 총선 때 본격적으로 강원도에서 역할을 맡았었다. 그 때는 우리 386세대들이 활동을 많이 했고 자치단체장이나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후 2006년 지방선거 출마를 권유 받았으나 다른 분에게 공천을 주고 나는 다시 경기도로 넘어왔다. 2010년 지방선거에 출마를 했다. 큰 꿈을 안고 있었는데 결국 고배를 마셨다. 내가 배운 것은 이런 큰 도시에 와서 정치를 하려면 남보다 두배이상 뛰고 인정받고 믿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좋은 기회가 찾아와 공천을 받을 수 있었고 경기도의회 의원 128명 중 128등으로 시작했다.“



- 지난 의정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메르스다. 9대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을 했는데 메르스가 터졌다. 보건복지부 밑에 질병관리본부가 있고 시·군에는 보건소가 있는데 그 땐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메뉴얼이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가 감염병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한 라인으로 연결해 일률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피해가 더 컸다. 메르스를 겪고 난 뒤 남경필 지사와의 일문일답 등을 통해 보건국 설치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이후 국 단위는 아니지만 감염병관리과가 생겨 일정부분 일조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이번 대선과 향후 활동 방향은.

”경제, 안보, 외교 등 우리나라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점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지금 무너져 있는 이 나라 국민 모두의 마음을 치유해줘야 하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시작을 해야 하다 보니 그러한 능력과 자질을 갖고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 당을 떠나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봤을 때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면을 갖고 있다고 본다. 대선이 끝나고 나면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의정활동도 중요하고 지역구도 중요하다. 꼴등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두배 더 노력하고 봉사해서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먹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김현우기자/kplock@joongboo.com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