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12)의주대로와 연행노정

▲ 동국여도 경강부임진도

경기북부에서 만난 의주대로(義州大路)와 연행(燕行)



길(路)은 인류역사의 발전과 문화의 생성, 소멸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그런 점에서 역사문화공간으로서 ‘옛길’은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교류했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이제는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인식들이 필요하다. 경기북부의 의주대로(義州大路)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선후기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道路考??에서 구분한 6대 간선로 체계에서 모든 출발점은 경도(한양)였다. 제1로인 <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은 경성, 홍제원,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산,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안주, 가산, 정주, 철산, 의주에 이르는 길이다.

의주대로는 서북지역을 지나는 ‘서북로(西北路)’, 관서지역으로 향하는 ‘관서로(關西路)’라 불리기도 했고, 사신들이 의주(義州)를 거쳐 중국을 오갔던 관계로 ‘사행로(使行路)’, 연행로(燕行路)로 불리기도 했다.

의주대로가 전국의 간선도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로로 인식되고 도로의 정비도 잘 갖춰졌던 이유는 바로 국가 외교사절이 오간 연행로(燕行路)로서의 기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주대로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던 통로였다. 이 길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학문이 중국에서 꽃 피웠고, 서구의 문물이 이 의주대로를 따라 조선에 유입되었으니, 의주대로는 중국으로 향하는 연행노정(燕行路程)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통신사노정(通信使路程)과 연계되어 ‘세계로 향하던 길이자 동서 문물교류의 통로’로도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행단은 중국 체험에 대한 경이와 새로운 문물을 접한 내용들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국내 의주대로 기록들은 매우 소략하다. 궁궐에서 임금께 하직한 후, 모화관(慕華館)에서 사대(査對)하고, 홍제원(弘濟院)일대에서 전별연을 마치면, 해가 뉘엿거릴 때 쯤 고양 땅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둔 녘에 고양관아의 별관인 벽제관에 든 사행은 저녁식사를 받고 숙박을 하거나, 아니면 저녁상을 물린 후 내친김에 파주목 관아까지 가서 숙박을 하였다.

연행을 떠나는 사신들의 연행노정은 의주대로의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양, 파주, 장단으로 이어지는 경기의 의주대로는 옛길의 형태는 변했을지라도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다. 지면제약을 감안하여 경기북부의 고양, 파주지역과 관련된 연행록 기록을 참고하여 의주대로의 주요 공간을 따라가 보도록 한다.


▲ 역관 김지남 공적비

국제인, 역관 김지남과 김득련



청나라의 수도 연경(燕京)까지의 거리는 3000리길, 왕복 5~6개월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가장 중시했던 측면이 있고, 그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역관(譯官)이었다. 전통시대 600여년 사행역사 속에서 숱한 역관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명멸했지만, 큰 족적을 남긴 숙종대의 김지남으로부터 구한말 김득련에 이르는 우봉 김문의 역관들을 고양에서 만날 수 있다.



▲ 역관 김득련 묘역


구파발역 인근의 이말산(莉茉山) 북서쪽 자락에 우봉김씨 선영이 있는데, 그곳에 구한말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를 지낸 역관 김득련(金得鍊,1852~1930)의 묘역이 있다. 김득련은 조선말기의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활동하였으며, 봉사(奉事), 교회(敎誨)를 지낸 인물이다.

조선정부의 사행외교는 1895년 공식적인 대청 외교관계의 단절이후, 중국이 아닌 서방세계(러시아·미주·유럽,)으로 향했다. 한어역관인 김득련은 1896년(고종33)4월, 러시아 황제(니콜라이2세) 대관식(戴冠式)의 특명전권공사인 민영환(閔泳渙,1861∼1905)의 사행단에 2등 참서관(參書官) 및 4등 주임관 자격으로 참여하여 수행하였다. 그는 생경했던 구미대륙과 유럽, 러시아견문의 소회를 『환구일록(環?日錄)』과 『부아기정(赴俄記程)』, 『환구음초(環??艸)』등으로 남겼는데, 함께 사행했던 민영환의 『해천추범(海天秋帆)』 역시 김득련의 기록을 기초로 작성된 것이다. 이들 저작은 근대유럽의 새로운 문물과 세계정세의 실상은 물론, 조선지식인들의 근대 인식에 대한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김득련은 근대를 경험한 국제인이었다.



고양 삼송리의 고개인 여석현은 숫돌고개라고도 한다. 임진왜란당시 조선을 도와 참전한 명의 원군 이여송장군이 왜군과 접전하다 퇴패했던 벽제관 전투의 현장이다. 앞에서 소개한 김득련의 선조이자 그보다 앞선 시기의 대표적인 역관인 김지남과 그 후대의 묘역이 있다.

김지남(金指南,1654∼1718)은 1672년(헌종13)에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한학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682년(숙종8)의 일본 통신사행(通信使行)에 압물통사(押物通事)로 따라가 『동사일록(東?日錄)』을 남겼고, 1698년엔 화약제조법에 성공하고 이를 정리한 <신전자초방>을 저술했다. 특히 1712년 5월에 조선과 청이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때,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1559~미상)을 수행하여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조선의 강역이 침탈 받지 않도록 설득하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우는 데 공이 컸다. 아울러, 조선외교사를 집대성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편찬(1714년)하여 외교사의 맥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시대, 역관들은 누구보다 먼저 세계를 경험했고 새로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시대를 앞서 변화를 주도했던 집단이자 그들 스스로 세계인이었다. 김지남과 김득련에 이르는 우봉김문의 역관들은 평생을 역관으로 오갔던 의주대로 변에 묻혔다.



연도의 유적과 명소, 詩文으로 남아,



1872년 지방지도의 ‘파주지도’에 보이는 ‘미륵현’은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을 말한다.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


▲ 용미리 석불입상(혜음석불)


혜음재에는 돌미륵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데 그 키가 수십 척이나 된다.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하나는 네모지고 하나는 둥글다.



曇雲如浪護山頭

물결같은 흐린 구름 산 머리를 지키는데

石佛分身幷兩肩

돌부처 분신하여 두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萬劫風磨猶卓立

만겁을 바람에 갈리면서도 그대로 우뚝서서

懸應太始上干天

멀리 태초와 호응하여 위로 하늘을 지른다.





▲ 윤시중교자총(좌)-전마총비(우)


고려명장 윤관장군의 묘역은 연도에 있었기 때문에 사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사신들은 어김없이 감회를 적었다. 이해응이 ‘廣灘橋’라는 시에서 “지나는 곳에 윤시중교자총비(尹侍中驕子塚碑)가 있다. 예부터 이곳이 윤씨·심씨(沈氏)가 다투어 송사하던 곳이라고 일컬어왔다.” 라고 하여, 고려 말 명장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장군의 묘역을 지나면서 당시 파평윤문과 청송심문의 산송분쟁(山訟·묘지에 관한 다툼) 사연을 상기하기도 하였다. 이 산송분쟁은 윤심문중의 갈등을 넘어 임금이 중재에 나설 만큼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2007년 두 문중의 후손들이 극적으로 갈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한 끝에 ‘400년 산송분쟁’을 끝내고 화합을 도모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일면 전통시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문과 조상을 경모하는 정신사의 한 면을 읽을 수 있다. 이제는 의주대로변에서 만나게 될 미담이 되겠다.



임진나루, 북녘으로 향하는 의주대로의 길목

옛 파주목(현 파주초등학교 일대)의 소재지가 인근 금촌으로 옮겨진 탓에 관아가 있던 주내(州內)는 한적한 시골 소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조선시대 파주목은 인근의 4개 군현을 관할하는 영향력이 있었다. 파주목 관아가 관할하는 서북교통 물산의 요지가 바로 임진강 임진나루였다.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임진강은 한강과 합류되어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약 700리(274km)에 달하는 긴 강이다. 임진나루와 임진강의 지정학적 위치와 중요성은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에서 잘 드러난다. 군부대의 통문이 가로막혀있는 임진나루는 옛 진서문의 위치에 그대로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북부와 한양을 잇는 수로교통의 요충지였다. 남과 북을 이어주고 물산과 문화가 소통하던 가장 번화했던 나루터였다.



임진강은 어민들은 제한적인 어로 활동을 통해 참게, 황복, 등을 잡으며 임진강을 매개로 하는 삶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임진강변에 세워진 화석정과 숱한 정자, 누각, 임진적벽은 ‘임진 8경’으로 시인묵객들의 시선을 받았고, 조선을 오가던 명·청 사신들의 유람지로 인기가 있었다. 임진강 너머는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이다. 남한지역 의주대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분단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이어지던 의주대로는 임진나루-동파나루-장단을 거쳐 판문점 판적천교를 지나야 하지만, 군사분계선으로 가로막혀 오늘날 북한을 오가는 이들은 고속도로를 달려 개성으로 향한다. 지금 비록 분단조국의 냉엄한 현실을 살고 있지만, 남북관계가 조속히 개선되어 상호교류의 날이 와야 한다. 양측의 역사에서 공통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의주대로이고, 사행노정(연행노정)이며, 우리민족의 역사지리(歷史地理) 공간이기 때문이다.



▲ 의주대로
연행노정(燕行路程)의 시작과 끝, 의주대로



연행은 외부와 단절되었던 전통시대에 외국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창이었으며, 연행노정은 동서의 문화와 인적물적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되었던 소통(疏通)의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행노정은 단순한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역사와 문화가 스며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총 6개월여에 걸친 중국 사행이 끝나면 어김없이 임진나루를 건너 파주목―고양군 벽제관을 거쳐 한양으로 귀환했다. 의주대로 한양―고양―파주구간은 연행사신들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갖고 떠나던 출발지요,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오는 종착지였다. ‘세계를 보는 창(窓)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바로 의주대로였고 연행노정인 셈이다.

새로운 남북관계의 형성과정에서 지금은 통일로와 자유로가 옛 의주대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의주대로의 기능은 쇠퇴하였지만, 이 옛 길에서 우리의 역사를 찾고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이 길을 기억하는 노력들을 지속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통시대 한중교류사의 면모를 온전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난 600여 년간 끊임없이 교류했던 동아시아의 문화로드, ‘연행노정’을 다시 주목해야 하고, 그 시작과 끝은 바로 ‘의주대로‘다.

신영담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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