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13) 경기인(京畿人)을 접한 서양인

조선후기 경기인(京畿人)을 접한 서양인들


▶세계지도와 이방인, 나

우리 또는 나와 같지 않음에 대한 한자는 ‘다를 이(異)’이다. 조선후기까지 우리와 다른, 특히 서양인에 대해서는 ‘이방인(異邦人)’, 그들이 타고 나타난 배는 ‘이양선(異樣船)’ 등으로 명칭했다. 중국인, 일본인들은 이방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선 그들이 생김새에서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에서이다. ‘이방인’의 명칭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마이너리티로서의 ‘미지(未知)’에서 시작했겠지만, 조선말기 어느 때부터인가 제국주의의 힘을 타고 메이저리티로서 선망(先望)의 대상으로 사용되곤 했다. 현재의 몇몇 카피들은 여전히 그러하다.

어릴 적 우리나라가 중심으로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환상이 깨진 것은 오래지 않았다. 중2때인가 이탈리아의 선교사인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그려진 것이고, 내가 착각하고 있던 조선은 그 부수적인 결과였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약간의 실망감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20여년이 지난 후 유럽과 미국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고, 40대를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2년을 머무를 시간을 가졌다. 낮선 어느 곳에 걸린 세계지도는 동아시아가 세계의 변방임을 보여주었다.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지도는 더 이상 내게 진리가 아니었다. 그곳 출신인 나는 변방에 머무르는 경계인이자 이방인이었다. 마이너리티로서의 체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이런 경험을 현재 우리 곁에서 겪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조선에서도 이를 겪은 이방인들이 간혹 있었다. 삼국, 고려에도 우리모습과 다른 외국인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하기엔 지면이 짧고, 필자의 지식도 짧다. 조선후기 경기인(京畿人)을 접했던 마이너리티로서, 근대의 접점에서 점차 메이저리티로 등장한 그들을 살펴본다.



▶조선국(Tiocen Cock)에 표류한 파란 눈의 블론디

1512년 마젤란이 필리핀을 발견한 후 그들은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과 장사를 위해 항해했다. 광저우, 나가사키를 오가던 파란 눈들이 16세기 말부터 조선에 등장했다. 1582년 포르투칼 사람인 마리이, 1604년 스페인 사람 후안 멘데스 등이다. 그들은 이제껏 보아 온 중국인, 일본인들과 확연하게 달랐다. 조니 뎁의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1400년대 초기,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우른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했던 조선의 대외관계는 이후 명나라와 일본으로 고착되었다. 배가 난파되어 조선에 표류한 서양인들은 바로 명나라로 압송되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죽음에서 벗어났음을 느낀 순간, 전혀 알지 못하는 천지산간의 사람들을 맞닥뜨려야 했던 서양인들에게 조선인들은 극도의 위기감과 경계심의 대상이었다. 또 느닷없이 이들을 만난 조선국 사람들도 블론디 머리칼에 도드라진 코를 가진 이방인은 다가갈 수 없는 경계너머의 존재였다.

1628년(인조 6). 네덜란드 사람인 야너스 벨테브레(Jan J. Weltevree, 朴燕) 일행 3명이 경주 근해를 표류하다가 밤에 발견되었다. 그들에게 조선인들은 “인육을 구워 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밤을 밝힌 사람들의 횃불을 자신들을 굽기 위한 것으로 알고 소리가 하늘에 닿도록 목청을 높여 울었다고 한다. 공포 자체였을 것이다. 정묘호란 이후, 그들은 명나라나 나가사키로 가지 못하고 조선에 억류되었다. 이후 훈련도감에서 홍이포(紅夷砲) 제조기술을 전했고,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경주에서 한양으로 이송되면서 벨테브레 일행은 경기도의 풍경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또 서양식 화포 제조과정에서 남한산성 등에 체류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경기도는 조선의 다른 지방과 차이가 없는 여전히 낮선 곳이었다.

1653년(효종 4) 8월. 인도네시아 자와 섬을 출발, 타이완 경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다. 모두 36명이었다. 대부분 심한 부상을 입었고, 28명은 이미 폭풍에 휩쓸려버린 상태였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은’ 그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주목사는 약 2천여 명의 군인들을 보내 경계했다. 그리고 양의 목에 방울을 달듯이 하멜 일행에게 방울달린 깃을 목에 달도록 했다. 또 자신들을 목매달아 죽일 것으로 오해했던 밧줄로 조선 군사들은 난파된 배의 물건을 건져 올렸다. 조선 정부에서는 벨테브레를 제주에 보내 하멜 일행을 안심시켰다. 지옥나락으로 여겨졌을 법한 이지(異地)에서 뜻밖에 고국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 어떠했을지… 한양으로 이송된 수십여명의 하멜 일행에 대한 호기심은 두려움과 겹쳐 나타났다. “괴물처럼 생겼다”, “물을 마실 때 코를 젖힌다”. 국왕은 서양(네덜란드)의 춤과 노래를 해보게 했고, 양반들은 그들을 집으로 들이기도 했다.


▶하멜, 남한산성을 가다

대포 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니 천둥 같구나/외로운 성을 깨뜨리자 사기가 흉흉하도다

이미 늙어버린 나는 오직 담소(談笑)를 듣는듯하여/초가집에 앉아 조용히 죽기로 결심했네(정온, 1569∼1641, 〈(남한)산성〉, 《동계집》)

1636년. 조선은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가 몰고 온 홍이포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산성에서 항전했던 국왕은 송파에 나가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마음깊이 새겨야했다. 세자까지 볼모로 내주었다. 무너진 조선은 국가를 재조(再造, rebuild)해야만 했다. 이 무렵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독일계 예수회 신부인 아담 샬(Adam Schall)과 교류하며 서양문물에 눈뜨고 있었다. 가톨릭 관련 자료를 비롯하여 지구의‘망원경 등과 같은 천문학’수학 관련 문물이 세자의 소식과 함께 간간히 조선에 전해졌다. 병자년의 치욕을 곱씹으며 북벌을 생각했던 효종은 23세의 청년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사기술을 전수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청나라 사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조선 조정은 그들을 남한산성에 가두었다.

“1654년 3월 만주(청나라) 특사가 매년 받아가는 조공을 받아가려고 왔다. 왕은 청나라 칙사가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를 커다란 성채로 보냈다. 이 성채는 서울에서 약 45~50km 정도 떨어진 아주 높은 산 위에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약 15km 정도 올라가면 있었다. 그곳은 튼튼한 요새라서 왕이 피난했던 곳이었다. 이 나라의 고관이 살고 있었고, 항상 3년분의 식량이 저장되어 있어 수천명이 지낼 수 있었다. 그 요새는 남한산성이라 했고, 우린 청나라 칙사가 떠난 9월 2~3일경까지 그곳에 있었다. 각 읍에서는 주변 사찰에 있는 많은 승려들을 교대로 임명해서 산 속의 성채와 요새를 관리한다. 유사시에 이 승려들은 승군이 되었고, 칼과 활, 화살로 무장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로 여겨지고 있고, 그들 중에서 선출된 대장의 지휘를 받는다. 이들도 군적에 올라 있다. 따라서 국왕은 항상 병사든 대장이든 노동자든 승려든 간에 군복무에 임할 수 있는 양민의 수가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헨드릭 하멜, 《하멜표류기》).

하멜 일행은 1654년 3월부터 9월 초까지 반 년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된 직후였다. 서울에서 40~50km, 가파른 오르막이 15km, 총 65km라는 하멜의 언급은 낮선 곳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긴장 속의 심리적 거리였다. 그들은 당장 어찌될지 모르는 전혀 예기치 못하는 상황에서 지형지물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했다. 오직 벨테브레를 의지할 뿐이었다. 6개월을 머문 조선의 풍경은 이국적인 호기심과 신기함보다 경계심 자체였다. 그들은 서울에서 산성까지의 길에서 만난 경기풍경(京畿風景), 경기인(京畿人)에 대해 아무런 감성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한산성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벨테브레의 도움이었을 것이다. 하멜은 산성을 “커다란 성채이자 튼튼한 요새”, “국왕의 피난처”, “고관이 살고 있는 곳”, “수천명이 3년을 지낼 수 있는 식량이 저장되어 있는 곳”, “승군들이 수자리(戍) 하는 곳”으로 파악했다.

《효종실록》과 《비변사등록》 등과 비교하면, 하멜의 서술은 거의 사실로 확인된다. 하멜이 만난 산성의 고관(高官)은 광주유수로 수어사를 겸했던 이시방(1594∼1660)과 총융사 김응해(1588∼1666) 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시방은 정묘호란 직후인 1628년 광주목사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한 바 있고, 1642년, 1645년, 1654년 세 차례에 걸쳐 광주부유수로 수어사를 겸직했다. 김응해는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을 지켰고, 1647년 어영대장으로 있다가 이때 남한산성총융사로 근무했다. 하멜은 한남루(漢南樓)를 지나 왕이 머물렀던 행궁을 수차례 드나들었을 것이고, 이시방과 김응해 등 고관이 살고 있는 거처-광주유수부(廣州留守府) 관아-에 머물렀을 것이다.

1652년 9월 호조판서로 있던 이시방은 남한성을 방어하는 방책으로 화포(火砲) 3백문을 산성의 절에 나누어 설치하고, 서울에 있던 화약도 옮겨 충분이 보관하도록 했다. 또 영남에서 마련해 온 화약 1천여 근과 연환(鉛丸, 납탄)을 수어청 각 관아에 배분하여 연습시켰고, 영남에서 올라온 군목(軍木)에서 산성에서 사용할 몫을 우선 확보했다. 이에 효종은 분배한 화약과 납탄에 수령들조차 익숙하지 못하니 중군(中軍)을 파견해 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했다. 또 산성에서는 전국에서 모은 석유황(石硫黃)으로 화약을 만들었고, 조총을 제작했다. 산성에는 평소 5~6천석에 이르는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고, 그 목표량은 1만여 석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장차 파란 눈의 마이너리티가 불러올 흉흉함에 대비하는 한편, 그들이 지닌 화포ㆍ화약 제조기술을 전수받으려 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외부와 분리된 공간인 산성에 가두어 관리하고, 전수받은 기술을 현장에서 실험하려했다. 산성에서 봄, 여름, 가을을 지낸 하멜 일행은 수어장대에서 펼쳐지는 경기산하(京畿山河)를 전망했고, 산상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그들의 감성을 확인할 수 없다.



▶준비되지 않은 만남, 그리고 근대

14~16세기 블론디들에게 조선은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람들”, “흉악한 사람들’이 사는 섬으로 간혹 소개되었다.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로 특히 몽골을 뜻하는 타타르(Tartar)의 나라라는 몇몇 정확하지 않은 자료를 통해서였다. 17세기에 불론디들은 앞서 중국과 일본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조선을 ‘표류’라는 절치절명의 순간에서 체험해야했다. 한껏 움츠렸을 때 ‘흉악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의 상황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시 탈출을 준비했다.

“조선인들은 전쟁 때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숲으로 도망가서 죽고자 했다. 겁 많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비운(悲運)으로만 여겼다”(헨드릭 하멜, 《하멜표류기》)

조선에서 병자호란을 겪은 벨테브레가 하멜에게 한 말이다. 하멜보다 먼저 25년 넘게 조선을 경험한 사람의 말이어서 그런지 보다 구체적이다. 익숙함이었다. 이후 하멜 일행은 전라도로 이송되어 1666년 8명이 탈출할 때까지 13년을 조선에 머물렀다. 조선에서는 벨테브레와 하멜을 막연히 남만인(南蠻人)으로 알았다. 그들이 네덜란드 사람(阿蘭陀人)임을 안 것은 하멜이 탈출한 후였다. 그리고 2백여 년 후 우리는 강화도에서 프랑스, 아메리카의 조선 원정(Korea Expedition)“을 통해 힘의 메이저리티로 자리하려는 서양인들을 맞아야했다. 우리에게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로 알려져 있다. 근대는 그렇게 다가왔다. 이후 많은 질곡이 있었고, 아직도 그 속에 있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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