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파란만장한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어린시절 가난을 통해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지만 가난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다. 사춘기 시절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달으며 방황하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거침없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된 뒤 변호사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귀향하면서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 2차례와 시민사회 수석, ‘마지막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운명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당선된 이후 18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아깝게 패배했다.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기 위해 당 대표 경선에 나서 승리한 후 원칙을 지켜 만든 당 혁신을 통해 20대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라 9일 실시된 제19대 대선서 승리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호’를 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 유년과 소년 시절 -자유의 땅, 그러나 숙명과 같은 가난-

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자유를 찾아 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1·4 후퇴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잠시 중공군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 준비도 없이 서둘러 떠나온 피난길이 한평생 실향(失鄕)의 한으로 이어졌다.

피난민 문 대통령은 가족에게 가난은 천형과 같았다. 끼니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궁핍한 시절, 예닐곱 살 문 대통령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신선동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긴 줄을 서야 했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가 힘겹게 끄는 연탄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인 문 대통령의 몫이었다. 좁고 가파른 신선동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문 대통령은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 청소년 시절 -수재, 문재·문재인-

문 대통령은 부산 최고 명문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 경남중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빈부 격차 등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된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문 대통령은 독서에 빠져 들었다. 지식에 갈증 난 소년은 늘 책이 모자랐다. 학교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문 대통령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와 인생을 익히고 우리사회의 아픈 현실과 마주한다.

명문 경남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자칭 뜨거운 문학청년들과도 우정을 쌓아갔다.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문제아’라는 별명이 나중에는 실제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서울대 상대에 응시해 낙방했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명문대를 마다하고 경희대를 선택한 이유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 경희대 재학 당시의 문재인 대통령
◇ 대학시절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문 대통령이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노골화 되던 해다.

문 대통령은 1974년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듬해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 다음날,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1975년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결국 강제징집 당한다.

▲ 특전사 군 복무 시절 당시 모습.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 대통령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 전두환 준장, 대대장이 장세동 중령이었다. 군인 문재인은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 훈련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군 생활 경험 이후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들도 도전정신으로 하다보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군 생활의 경험은 문 대통령을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 사법연수원 수료 당시 동기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찍은 사진.
◇ 청년시절 -우울한 젊은 날의 초상-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문 대통령이 맞닥뜨린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졸업장 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은 문 대통령을 사법고시의 길로 이끌었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날 문 대통령은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다음해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정진하던 중 10·16부마항쟁과 이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2·12 쿠데타 등 정국이 급변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 온 문 대통령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 서서 거침없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학내 시위 와중에 2차 시험을 치렀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문 대통령은 구속되고 만다. 이후 5·18 광주항쟁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들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즉결 회부됐다. 이때 문 대통령은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미결수로 남아 있었다. 그 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문 대통령은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경찰서장은 축하 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열 수 있게 해 주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변호사 시절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김정숙과 결혼했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박정규 민정수석과 조배숙 의원, 박은수, 고승덕 전의원 등 연수원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도 문 대통령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성적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된다. 문 대통령은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홀로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의 귀향으로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노무현과 문재인’, 둘의 관계는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 온 동안 가장 보람 찬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
◇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함께 국정 운영-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 2차례와 시민사회 수석, ‘마지막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참여정부 출범과 마감을 함께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 시절 누구보다 대쪽 같았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이었던 특혜를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과로로 건강을 상한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으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곧장 귀국하여 하고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탄핵 재판이 끝나자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하여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을 맡았다. 두 번의 민정수석 동안 가장 큰 아쉬움은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불발이었다. 제도적으로 권력기관에 대한 견제와 법적감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2007년 3월,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성사와 한미 FTA라는 국가중대 협약 체결 과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풍부하게 축적된 경험은 다양한 정책조율 감각과 국정운영에 대한 균형감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후 -운명의 시작-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 대통령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보통사람으로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세상은 문 대통령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정권이 흔들린 이명박 정권은 집권안정을 획책하는 탈출구로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을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은밀한 조사가 시작된다. 점점 정치보복의 올가미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2009년 4월 30일 ‘치욕스런’ 검찰 수사를 마친 노 대통령을 사저에 모셔다 드리고 밤늦게 양산 집으로 돌아온 문 대통령은 고통스럽게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끝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 대통령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게 각인되면서 새로운 정치인 문 대통령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불의에 무너지는 정의를 바라보는 상실감이 문 대통령을 정치에 발을 내 디디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 정치입문과 대선도전 -사람이 먼저 인 세상을 위해-

문 대통령이 살아 온 삶은 가장 정치적이었지만 가장 비정치적이었다.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정치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 대통령이 살아 온 바른 삶이 ‘운명’이 되어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들였다. 평범한 사람 문 대통령의 정의로운 시대를 위한 복무가 시작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이 걸었던 길처럼 좁은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민주당의 가치를 지키며 민주당을 부끄러워 외면하지도 않고 정면에 내세워 부산에서 당선됐다.

총선승리 두 달 후, 문 대통령은 마침내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정치신인 문 대통령이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안철수 후보와 어렵게 단일화에 이뤄내고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임을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3가지 교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천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정권교체에 실패한다. 문 대통령이 득표한 1천400여만표, 득표율 48%는 야권 대선후보 역대 최고의 득표수, 득표율이었다.



◇ 대선패배와 새로운 정치의 시작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

대선 패배 이후, 문 대통령은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침잠(沈潛)의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했다. 비록 선거에 패했지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던 사람으로서 국민에 대한 책무이자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택한 길은 오만과 반역의 역사였다. 국정원 대선공작 불법 선거를 오히려 비호하고 두둔했다. 급기야 진실을 덮기 위해 검찰총장을 끌어 내리기까지 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NLL 포기 논란을 재연하고 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공개하면서까지 국론과 국민을 분열시켰다. 문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NLL 포기 발언 논란에는 도저히 침묵할 수가 없었다.

2014년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정부는 변명하기 급급했고 대통령은 무능하고 야비했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정부가 나서 덮고 은폐하기에 바빴다.

국회는 참사 후 271일만 인 2015년 1월 12일에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지만 채 진상조사도 이뤄지지 못한 채 세월호 특별위원회는 마감되고 말았다. 문 대통령은 이 모든 국민의 고통이 정권을 쟁취하지 못한 자신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 당대표 시절 -원칙을 지켜 만든 당 혁신과 총선승리-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과 약속한 공약 대부분을 파기했다. 시간이 갈수록 무능함과 측근 비선실세의 전횡이 드러났다. 경제적으로도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지며 서민경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사회 곳곳에서는 권력형 비리가 터졌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의 실정을 견제하고 국민을 대변해야 하는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국민의 시선은 차가웠다. 창당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2014년 12월 29일 문 대통령은 당대표 출마선언을 한다. 당을 혁신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총선은 물론이며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야권 기득권에 안주한 당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누가 대선후보가 된다고 해도 정권교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배가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당을 혁신해야 했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국민의 힘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되었다. 당을 흔드는 기득권의 분당과 탈당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당 혁신에 성공했다.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정한 공천 룰을 만들었다. 우리사회 각계각층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여 낡은 당 문화를 젊고 역동적인 당으로 쇄신했다. 이후 당대표를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비며 마침내 총선승리, 제 1당을 만들어 냈다.



◇ 제19대 대통령 출마 당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

촛불혁명, 불의에 일어 선 정의로운 국민이 박근혜 정권을 침몰시켰다. 불의한 권력과 낡은 권위에 맞선 국민의 도구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 다였다.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희생정신이 마침내 권력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문재인 기꺼이 국민의 촛불이 되기로 결심했다.

문 대통령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혼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좋은 선의도 혼자하면 독선이 된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내 능력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문 대통령이 다짐하는 정권교체의 주체는 국민이다. 적폐청산의 과정도 국민 속에서 함께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목표도 오로지 국민이라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마침내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할 기회를 맞았다.

김재득·나은섭기자/jdkim@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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