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옛 선영 뒤로하고 진짜 명당 찾다

포천 백사 이항복 묘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2에 있다. 묘역에는 이항복과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인의 묘가 쌍분으로 있다. 그 왼쪽 아래에는 정경부인 금성오씨 묘가 홓로 있다. 첫 부인인 안동권씨는 권율의 딸이다. 어린 시절 바로 옆집에 살았다. 이 때문에 권율 장군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오성의 집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가자 그 집 하인들이 감을 따먹었다. 화가 난 오성이 권율 집으로 뛰어 들어가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는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냐”고 물었다. 권율이 “너의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냐”고 하였다. 그러자 “그럼 감나무 가지의 감은 누구의 감이냐”고 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권율은 오성의 기지를 높이 사서 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두 번째 부인 오씨는 우의정 오겸의 서손녀다. 아버지는 감찰을 역임한 오언후다. 14세에 오성에게 후처로 가서 30여년 내조하고, 오성이 사망하자 소복을 입고 채식을 하며 30년의 여생을 보내다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2남2녀를 낳았다. 장남 이규남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차남 이기남은 소과에 합격하고 가선대부로 여러 번 군수·부사·부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첩으로 정경부인 직첩을 받은 사람은 오씨부인과 정난정, 논개 세 사람뿐이다. 그러나 정난정은 후에 삭탈되었으므로 논개와 함께 두 사람뿐이다.

오성 이항복하면 한음 이덕형(1561~1613)이 떠오른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5살의 나이 차이가 나고 태어나 자랐던 동네가 다르므로 모두 꾸며진 이야기다. 오성이 한음보다 다섯 살 위다. 또 필운동에 있는 오성의 집과 퇴계로에 있는 한음의 집은 약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둘이 친해진 것은 과거에 급제하면서부터다. 오성은 25세 때이고 한음은 20세 때다. 둘은 홍문관에 들어가 문한(文翰)을 다루는 일을 했는데 여기서 나이 차이를 떠나 친해진 것으로 보인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두 사람은 금성오씨를 같이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미모가 있으면서도 영특하고 시와 문장에 능해 오성·한음과도 교류 하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씨는 점잖은 한음에게 마음이 더 갔다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 적극적이고 호탕한 오성이 후처로 맞아들였다. 오씨 부인은 오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기지를 발휘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오성이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피난하자 같이 동행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그 공으로 부인과 그 소생들이 면서(免庶)가 되었다. 또한 오성이 북청으로 유배 갔을 때도 동행했다. 오성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여를 운구하여 지금의 자리에 장례지내고 6년 동안 시묘 살이를 했다.

백사 이항복의 묘는 조선 중기 때의 풍수가로 유명한 박상의가 잡아준 자리다. 『백사집』에 의하면 이항복은 선영이 좁아 더 이상 남은 땅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자기가 죽은 뒤 자손이 잘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근심을 하면서 좋은 땅을 따라 구할 것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교수 박상의를 만났다. 박상의가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포천을 지나다가 귀문(貴門)의 선영을 들려보았는데, 지금 조상 묘를 쓴 곳은 다만 가지에 불과하고 본줄기의 복지 터는 따로 있다. 그곳을 버려두고 있어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이 말을 들은 백사는 뛸 듯이 기뻐서 바로 말을 대령하여 박상의와 함께 포천에 가서 본인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했다. 이후 백사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곳은 한북정맥의 정기를 받는 땅이다. 수원산(697m)과 국사봉(547m)을 지나 죽엽산(622m)으로 가기 전 한 맥을 서쪽으로 뻗었다. 평지로 내려 내려온 산맥은 야트막한 구릉으로 변했다. 산맥의 변화는 활발하여 힘이 넘친다. 능선이 위아래로, 좌우로 변화하는 모습은 거대한 용을 연상시킨다. 산맥의 끝자락에 이르러 기를 모아 혈을 맺었다. 혈장은 풍만하고 땅은 단단하다. 죽엽산에서 내려온 좌청룡 자락은 겹겹으로 감싸며 혈 앞을 지나 안산과 조산을 만든다. 우백호는 국사봉에서 주룡과 같이 내려온 산줄기들이다. 모두 이곳을 감싸며 커다란 보국을 형성하였다. 묘지 앞의 들판은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이곳으로 주변의 물들이 모여든다. 산은 인물, 물은 재물을 뜻한다. 그러므로 부와 귀가 끊이지 않고 나올 자리라 하겠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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