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대통합 의지를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9일 밤 서울 광화문 당선 답례 연설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진영 논리를 뛰어넘어 지역ㆍ세대ㆍ계층을 아우름으로써 국민 대통합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선거운동 당시 국회와 긴밀하게 대화하고 협력함으로써 정치권 무한투쟁을 해소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박영선 통합정부추진위원장도 미국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와 남북전쟁 등 국난을 극복하려고 정적을 입각시킨 사례를 거론하며 협치를 다짐한 바 있다.

링컨은 적을 친구로 만들어 위기에서 국가를 구해낸 인물로 유명하다.

링컨이 상생 리더십을 발휘한 것은 대통령 당선 직후인 1861년 4월이다.

노예제 찬반 세력이 남북전쟁에 돌입하자 전시국방 장관으로 깜짝 인사를 발탁한다.

소송 상대 대리인으로 만나 악연을 이어간 에드윈 스탠턴 변호사였다.

스탠턴은 약 11년간 링컨을 조롱하거나 비판했다.

소속 정당도 반대 진영인 민주당이었다.

스탠턴 기용에 참모들이 반발하자 링컨은 "그만한 인물을 데려오면 쓰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적 영역은 사감에서 벗어나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한 것이다.

애국심이 강하고 정직한 스탠턴이 군대를 잘 이끌 것이라는 링컨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휘한 덕에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재무장관에 새먼 P. 체이스를 임명한 것도 성공한 포용 인사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경쟁자였던 링컨을 끊임없이 괴롭힌 체이스에게 정부 살림살이를 맡겼다.

1864년에는 파격 수위를 더 높인다.

체이스를 미국 제9대 대법원장에 추천했다.

대통령을 공개 험담할 정도라면 정치 중립이 필요한 대법원장에 적합하다는 판단에서다.

▲ 링컨이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윌리엄 스워드. 그는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는 부동산 거래 역사상 최고 대박으로 꼽히는 개가다.

정적 윌리엄 스워드를 국무장관에 앉힌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스워드는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인 주인공이다.

석유, 금, 수산물 등 거대한 자원보고인 알래스카 매입은 부동산 거래 역사상 최고 대박으로 꼽힌다.

'촌뜨기', '수준 이하 인간' 등으로 부르며 자신을 멸시하던 스워드를 국무장관직에 앉힌 덕에 한반도 7배 면적의 금싸라기 땅을 헐값에 인수할 수 있었다.

남북으로 찢어진 미국을 평화 공동체로 만들려면 보복보다는 화해와 소통을 우선해야 한다는 소신이 빚은 성과다.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집단극화'를 막는 데도 포용과 협치는 유용하다.

집단극화는 구성원이 의사결정 때 책임 분산을 믿고 개인 판단보다 훨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현상을 뜻한다.

정책 결정 참여자의 친밀도가 높을수록 집단극화 위험이 커진다.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회피하려는 성향 탓이다.

미국이 쿠바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고 감행한 군사작전이 실패한 데도 집단극화 영향이 크다.

미국은 망명 쿠바인 1만5천 명을 선발해 특수훈련을 거쳐 1961년 작전에 돌입한다.

수도 아바나에서 145km 떨어진 피그만에 침투한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상륙에만 성공하면 공산정권은 금방 무너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체제 인사들이 민중 봉기에 나설 것이라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를 과신했기 때문이다.

위험 요인과 문제점이 수두룩했는데도 걸러지지 않았다.

군사행동을 예고하는 듯한 CIA 국장의 발언도 악재였다.

쿠바가 침공 의도를 눈치채고 해안 방어에 진력했다.

반정부 인사 약 10만 명을 구금해 폭동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CIA와 군에서는 작전 성공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공수부대와 전차를 앞세워 해안을 봉쇄한 쿠바군에 궤멸하고 만다.

100여 명이 전사하고 1천113명은 생포된다.

포로는 나중에 5천300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제공하고서 풀려난다.

무모한 작전 탓에 85년 전 알래스카 매입에 들인 돈보다 약 7배나 많은 액수를 고스란히 날린 셈이다.

여러 원인이 겹쳐 실패했지만, 안보진용의 인적 구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침공 결정에 관여한 케네디 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안보보좌관, CIA 국장 등은 대부분 하버드대 동문이거나 매우 친한 사이였다.

서로 잘 아는 처지라서 별다른 반대 없이 의사결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위험 요인들은 자연스레 묻혔다.

케네디는 뒤늦게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서 CIA 국장을 파면한다.

더 나아가 CIA까지 해체하려고 칼을 꺼내 들었다가 암살로 무산된다.

이 때문에 케네디 암살에 CIA가 관여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한국 정치권도 내부 토론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집단극화에 취약하다.

일부 이견이 있어도 침묵하는 게 관행이다. 전체 흐름을 끊었을 때 분열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다.

집단극화를 막으려면 스스럼없이 직언하는 위징을 핵심 참모로 발탁한 중국 당 태종을 본받아야 한다.

당이 번영을 누린 데는 위징의 역할이 컸다.

위징은 한때 태종 살해를 모의했는데도 언관을 맡는다.

태종이 악연을 잊고 능력과 품성만 보고 선택한 결과다.

언관은 중요 정책 결정이나 고위 관료 선발 때 왕에게 쓴소리하는 요직이다.

왕의 과오를 들춰내고 역린을 건드리는 용기와 신념은 언관에게 필수 덕목이다.

조선 세종대왕에게는 허조가 위징 역할을 한다.

허조는 약 10년간 인사업무를 하면서 수시로 세종과 대립각을 세웠다.

국정운영에 하자를 발견하면 불경스러울 정도로 왕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세종을 성군으로 부른 데는 대쪽 참모인 허조의 공헌이 지대하다.


15세기 해양패권국 스페인은 견제장치가 없어 몰락한 사례다.

스페인은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최전성기를 누린다.

막강한 해양 전력을 앞세워 세계 곳곳을 영토로 삼는다.

한없이 뻗어 나갈 것 같던 기세는 머잖아 꺾이게 된다.

1556년 발표된 순혈령이 화근이었다.

혈통이 깨끗하지 않으면 성직자나 정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법령이다.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와 결혼한 조상을 둔 공직자나 교회 간부는 무조건 퇴출당했다.

스페인 핵심 인재 역할을 해온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는 외국으로 줄줄이 망명했다.

순수혈통 광풍이 몰아치면서 국가 역동성은 급격히 위축된다.

무역과 상업이 활기를 잃고 군사력도 뒷걸음쳤다.

1571년 레판토해전에서 오스만 튀르크를 누를 때만 해도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과 17년 만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한다.

1588년 무적함대를 앞세워 영국을 침공했다가 완패했다.

신대륙 등에 구축한 식민지도 대부분 빼앗긴다.

종교나 피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 순혈 광풍이 빚은 참상이다.

불구대천 원수를 국정 동반자로 삼아 강대국으로 도약한 영국과 비교된다.

영국은 1337년부터 프랑스와 116년간 벌인 백년전쟁이 끝날 무렵만 해도 유럽 변방의 조그만 섬나라에 불과했다.

프랑스 일대에 확보한 영토는 전쟁 패배로 대부분 상실했다.

설상가상으로 포화가 멈춘 지 불과 2년 만에 내전까지 겹친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놓고 30년간 혈전을 벌였다.

두 가문의 문장이 각각 백장미와 붉은 장미여서 장미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왕위를 이을 양가 직계가 없어 제3의 인물이 집권한다.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헨리 7세(1457~1509년)가 왕위에 올라 튜더왕조를 연다.

튜더왕조는 약 150년간 이어진 전쟁 상흔을 딛고 기적을 일군다.

정적을 끌어안은 대타협 노력 덕분이다.

적대 관계인 요크가 여인을 왕비로 맞고, 두 가문을 상징하는 흰색과 붉은색을 섞어 '튜더장미'도 만들었다.

튜더장미는 국민 화합을 상징했고, 영국 왕실의 상징문장이 됐다.

영국은 머잖아 전쟁 폐허를 딛고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최강국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연파하고 해상 주도권도 장악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영국과 스페인 흥망사는 적잖은 시사점을 준다.

국민 편 가르기는 몰락을 재촉하고 협치는 잿더미를 황금으로 바꾼다는 게 핵심 교훈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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