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군은 강화도 덕진진과 초지진에서 미군과 맞서 싸웠지만 화력의 격차가 심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완고한 통상거부로 철수한다. 사진은 신미양요의 전투 기록화.
19세기 동아시아 문명과 유럽 문명의 충돌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후 서양은 전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다. 19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에 서양의 힘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에 나타난 서양은 이전 서양과 달랐다. 19세기 초까지 중국과 서양 간의 경제적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은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동아시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서양과 동아시아 사이의 최초의 군사적 충돌은 1840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일어난 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중국에 난징조약을 강요하여 홍콩을 할양받고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방하게 만들었다. 1860년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베이징 조약은 중국 내륙 하천의 통행권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서양 세력은 중국 해안의 항구만이 아니라 내륙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중심 국가였던 중국의 패배는 조선에 큰 충격이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군제를 개편하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강화도 일대에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였다. 그런데 대원군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19세기 동아시아에 불어닥친 역사적 변화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18, 19세기는 인류가 맞이하는 세계사적인 문명의 전환기이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고, 유럽은 산업국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아직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는 모든 면에서 유럽과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중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은 이전의 군사적 충돌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전 조선이 경험하고 목도한 군사적 충돌은 농업 또는 유목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교전 당사자들의 전술, 군인의 수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친 국가의 산업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력과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군사력이 펼치는 전쟁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전쟁이었다. 매복 기습전을 펼치는 게릴라 전투를 제외하고 정규전 형태의 교전에서 후자가 전자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이후 전개된 역사적 사실로도 입증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조선과 대원군의 선택은 쇄국이 아니라 개항이어야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은 이것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중세 봉건체제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과 백성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 장면.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침략한 사건이다.
병인양요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속에 1866년 병인년에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때 프랑스 신부를 잡아 처형하였다. 외세가 쳐들어오면 천주교도들이 이에 호응할 것을 두려워해서 였다.

1866년 10월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공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 신부 처형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병인양요라 부르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는 조선 의용군과 사격술이 능한 포수의 기습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당시 조선 측은 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데 반해 프랑스군은 2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은 더 이상 조선에서 싸울 생각을 못하고 바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 등 문화재와 은궤를 약탈해갔다. 병인양요의 의미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이고,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 농업 기반 국가 군대와 산업 기반 국가 군대와의 전쟁에서, 드물게 농업 기반 국가인 조선의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점이다.



▲ 신미양요 당시 조선으로 출동한 콜로라도 호와 미군장교들. 1871년 미국은 전함 5척에 함포 85문, 병사 1200여 명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했다.
신미양요

1871년 5월 이번에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문책과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공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대동강에 진입한 무장 상선 제너럴 셔만호를 조선군대가 화공으로 불태운 사건을 말한다. 신미양요의 전개 양상은 병인양요와 달랐다. 미국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 보유하고 조선에 출동하였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지휘관 어재연을 포함하여 53명이 전사하였고, 24명이 부상하였다. 그러나 미군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사망자가 400명 이상이라 한다. 정확한 조선군의 피해를 알 수 없지만 격렬한 전투였고, 조선군이 미군에 비해 크게 피해를 입은 전투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원군이 끝까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조선의 개항을 단념하고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미국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서 펼친 포함 외교는 성공했는데 조선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같은 산업국가 기반의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이 조선군과의 교전에서는 이처럼 다른 결과를 초래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군사력의 차이, 이 중 대포 수의 차이이다. 프랑스군은 함재 대포가 10문이었는데 반해, 미군은 무려 85문이었다. 또 정족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매복 기습 전투였고, 미군과의 전투는 서로 마주 보며 펼친 정규 화력전이었다는 점이다. 이 화력전에서 조선의 대포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미군의 대포는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약탈한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기. 이 깃발은 2007년 미국으로부터 장기임대 형식으로 송환됐다.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위정척사사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다가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군사력을 기르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 산업의 힘을 갖추고 이를 위해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를 인식하는 이는 극히 소수였다. 박규수 문하의 김윤식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수의 병력보다 오직 대포의 정교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도이다.

쇄국 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성리학의 위정척사사상이 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현존하는 조선왕조가 존귀한 것은 ‘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실천을 포기한 왕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서양은 조선을 ‘금수(禽獸)’와 같은 나라로 만들려는 것이기에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미양요 4년 후 일본의 운양호가 강화도를 침범하였을 때 조선은 굴복하였고 다음해인 1876년 조선은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일본과 체결하였다. ‘여우를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이는 두 번의 전쟁을 치르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 결과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문명의 전환기에 쇄국정책을 뒷받침한 위정척사사상에서는 시대를 헤쳐 나갈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 강화도를 지나 외규장각으로 행군하는 프랑스군. 이들은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외규장각 도서와 문화재 등을 약탈해갔다.
19세기 조선의 다른 선택의 가능성

그런데 병인양요 직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할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대원군이 병인양요 직전 자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한 일이다. 1860년 베이징 조약 결과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톡을 차지하면서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대원군은 육지로 연결되는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크게 우려하였다. 실제 러시아 인이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한 바 있기에 대원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때 천주교 신자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영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을 막자는 건의를 하였다. 이러한 건의의 배경에는 대원군 부인인 민씨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천주교를 금지하는 조선정부의 정책에 변화를 꾀하고 싶은 남종삼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 대원군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 있는 천주교 베르누 주교를 통해 북경에 연락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보려 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베르누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만나려 하다가 곧 마음을 바꾸었다. 한편 베르누 주교도 정치 외교문제에 간여하는 것을 싫어하여 응하지 않아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만일 이 일이 성사되었으면 19세기 조선의 역사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이기에 가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실제 일어난 것과 다르게 전개되었을 경우를 상정하고 추정되는 결과와 실제 일어난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지난 역사적 사건의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실제 미국 경제사학계에서는 미국 대륙 횡단열차가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대륙 횡단열차가 개통되지 않았을 경우 미국의 경제성장을 추정하는 연구를 하여, 미국 대륙 횡단 열차가 미국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만일 그 때 대원군이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였을까. 물론 성리학자의 반발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서원 철페에서 보듯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정책은 누가 반발해도 추진하였다. 우선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지지지 않았을 것이고 병인양요는 몰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과 프랑스, 영국과 자주적인 통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보다 후발 주자로 조선에 들어오는 상황이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국 주도권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선택은 21세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진갑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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