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벽은 높았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유승민의 '새 보수' 도전은 희망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개혁을 외치며 새누리당을 차고 나왔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33명의 의원들과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 했지만 분위기는 냉담했다. 보수층에 격려를 기대했지만 '배신자' 프레임에 옴짝달싹 못했다. '촛불민심'에 보수개혁을 역설(力說)했지만 국정농단 협력자 낙인을 실감했다. 지지율은 바닥을 맴돌았고, 당(黨)마저 단일화를 명분으로 후보를 흔들었다. 급기야 뜻을 같이했던 13명의 의원들이 원래 있던 당으로 복귀하는 사태까지 맞았다. 당은 내홍에 휩싸였고 곳곳에서 중도 사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명분 없는 집단탈당이 오히려 정치인 유승민을 부각 시키는 역설(逆說)을 낳았다. 유 후보를 돕겠다는 후원금이 평소(日) 기준의 60배를 넘었고, 당원 가입 신청도 하루새 100배가 늘었다. SNS 팔로워도 하루새 1만3천여 명이 증가했다. 짧았지만 노무현의 '희망돼지'를 연상시키는 폭발력이었다. 더 흥미로운 건 젊은층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홍대와 강남거리 유세현장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대학생들이 대구 심장 동성로에서 유승민을 외쳤다. 같이 셀카를 찍고 SNS에 공유했다. 기존 보수에서는 볼 수 없던 낯선 풍경이었다. 집단 탈당의 반사효과이기도 했지만, 보수라면 질색하던 젊은 유권자들에게 보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다.

유승민의 대선 공약은 신선하다는 평(評)을 들었다. '폐지 줍는 노인', '송파 세모녀 사건'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듬는 '따뜻한 보수'를 지향했다. 재벌 개혁, 칼퇴근법, 징벌적 손해배상, 비정규직 획기적 축소, 청년실업수당 지급 등 진보적 노동정책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반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드(THAAD) 배치에는 진보와 명확한 선을 그었다. 세금 올려 공무원 숫자 늘리는 정책도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혀 보수의 가치를 지켰다. 

경선과 TV토론도 호평을 받았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펼친 바른정당 경선은 무대를 활보하며 스탠딩으로 진행됐다. 1:1 대결구도로 긴장감을 높였고, 경제·교육·안보 등 현안 준비도 잘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막말과 인신공격에 지친 사람들은 "후보자 토론은 저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예시를 보여 준 것 같다"고 했다. 이어진 본선에서도 논리와 전달력으로 5당 후보 중 가장 주목을 받았다. 개표결과도 선전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선기간 내내 3~4%의 지지로 정의당에도 못 미쳤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6.8%로 4위를 차지했다. 특히 청년층은 두 배에 이르는 13.2%(방송사 출구조사)의 지지를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고정 지지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끝까지 대선을 완주한 것도 향후 큰 자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대에는 못 미쳤다. 이번 대선은 기존 반공보수로는 어렵다는 것이 이미 예고돼 있었다. 그럼에도 보수의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대표주자 자리를 놓쳤다. 막판에 스퍼트를 올리긴 했지만 자유한국당에 3배 이상 스코어로 턱없이 밀렸다. 자신의 지역구이자 보수 텃밭 대구에서도 4위에 그치고 말았다. 바른정당은 교섭단체 지위를 겨우 지켰지만 의원 수가 반토막났다. 1박2일 연찬회를 개최하며 당의 결속을 다졌지만 내년 지방선거와 이후 총선 등 흔들릴 여지는 무수히 많다. 리더십 역량도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다시 초심(初心)을 되새겨야 한다. 그의 말대로 애초부터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 어쩌면 같은 편이라고는 없는, 지도에도 없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은 그 것이 보수가 사는 길이고,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달라질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적극 동감한다. 초심을 지킨다면 지금이 오히려 구태와 단절하고 깨끗한 보수로 거듭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군사정권 적통(嫡統)을 이었다는 불명예 딱지도 떼어 버릴 수 있다. 친일계승 세력이라는 진보의 공격 빌미를 끊어내고, 부자와 기득권을 대변한다는 왜곡된 이미지도 깨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양극단의 소모적 정치논쟁을 끝내고 온건한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경쟁하는 선진 정치지형을 구축할 수 있는 대변혁의 적기(適期)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것은 본인이 줄 곧 얘기하던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유승민의 ‘새 보수' 도전을 지켜본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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