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살이 했던 왕족, 사후에야 편히 눕다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276-1 선단초등학교 뒤편에는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묘가 있다. 묘역 입구에서 뒷산을 보면 고축사(誥軸砂)가 반듯하게 서 있다. 고축사란 정상이 일자(一字) 모양이고 그 양쪽에 뿔처럼 생긴 작은 봉우리가 있는 것을 말한다. 풍수지리 고전인 『지리인자수지』에는 고축사가 있으면 왕과 가까이 한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일까 철종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의 묘를 품고 있다.

조선 왕족 중에서 철종과 그 가족들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경우가 없을 것이다. 특히 전계대원군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참한 가족사를 안고 멸시와 천대 속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살다간 인물이다. 대원군이란 왕이 후사 없이 죽으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는데, 신왕의 친부에게 주는 호칭이다. 조선시대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등 4명이 있었다. 이중 정원대원군은 왕(원종)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실재는 3명이다.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은 영조의 증손으로, 사도세자의 손자이고, 은언군의 아들이며, 철종의 아버지다. 그런데 이 관계가 모두 후궁이나 첩의 소생이라는 점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비최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 모두 후궁이다. 사도세자는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 외에도 2명의 후궁이 있었다. 제1후궁인 숙빈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제2후궁 경빈박씨는 은전군을 낳았다. 영조는 적손자인 정조외에 서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궁 밖에서 살았는데 생계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철종가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은언군·은신군이 끼니를 이으려고 시전상인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제때 갚지 못했다. 이것이 영조의 귀에 들어갔다. 진노한 영조는 왕손의 품위를 실추했다며 이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여기서 은신군은 풍토병으로 죽고, 은전군은 홍인한·정후겸 등의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홀로 남은 은언군은 유배에 풀려났지만 그 아들 상계군 담이 홍국영의 역모에 휘말려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그 가족들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여기서도 불행은 비껴가지 않았다.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사옥이 발생한다. 이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영세를 받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죽고, 은언군도 사약을 받았다.

이제 강화에는 은언군의 후처 소생인 전계군 이광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강화읍 관청리의 움막집에 거주하며 남의 집 머슴살이와 일일 잡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늘 감시당하고 주민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지만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잠시 봄날이 왔다. 순조 30년(1830) 왕의 특명으로 유배가 풀려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관직을 받지 못했지만 첩을 들일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다. 이때 후처인 용담염씨 사이에서 원범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헌종 7년(1841) 전계군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3년 후 장남 원경이 민진용 등의 모반에 가담한 죄로 사사되었다. 가족들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원범 나이 14세 때다.

5년의 세월이 지났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 순원왕후(안동김씨)는 원범을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시켰다. 곧 제25대 철종이다. 철종은 즉위하자 아버지를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고 묘를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묘소는 정실인 전주최씨와 합장하였고, 그 옆 아래 능선에는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 용담염씨의 묘가 있다. 인근에는 철종의 이복형제들인 화평군(원경)과 영평군(경응)의 묘가 있다.


이곳의 맥은 해룡산(661m)에서 왕방산(736.7m)으로 넘어가는 중간에서 나왔다. 주산 현무는 고축사이고 그 아래에 삼각 모양의 귀인봉이 있다. 맥의 끝자락에 묘가 있다. 혈장의 형태는 커다란 가재처럼 생겼다. 좌우로는 청룡·백호가 감싸주며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흠도 많다. 우선은 용맥의 변화가 미미하다는 점이다. 용맥의 변화 정도에 따라 대혈·중혈·소혈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이곳은 보기와 달리 큰 혈로 보기는 어렵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기운이 약한 것과 같다. 안산은 이곳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지 않는다. 힘이 넘치는 자리라면 있을 수 없는 형상이다.

어쩌면 철종은 아버지 묘 이장을 통해 개혁 정치를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만큼의 자리가 아니라서 못내 아쉽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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