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전차는 69년간 운행되다가, 버스에 밀려 1968년 역사 속으로 물러나고, 지금은 당시 운행되던 전차 한대가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서있다. 그렇게 전차의 시대는 가고 1974년 서울역~청량리 구간의 1호선 개통과 함께 드디어 오늘날의 지하철 시대가 열린다. 현재 수도권 지하철의 노선과 거리는 런던과 뉴욕, 파리, 도쿄, 모스크바 등 세계 유명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1863년 런던의 지하철도를 시작으로 빈,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유럽과 미국의 지하철 대부분이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건설되었다. 그러니 우리 지하철은 그들보다 70년~100년이 넘는 세월의 차이로 건설된 후발주자인 셈이다. 따라서 그 규모와 시설이 가장 현대적이며 세계 최상급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 최고의 지하철을 이용하는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어디쯤일까? 아직은 실망스럽고 아쉬운 점이 많다. 여럿 있겠지만 그중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스마트폰의 왕국(?) 답게, 분별없이 큰소리로 주고받는 통화 소음이다. 주위 사람들은 애써 무관심한 척해보지만 영락없이 통화 속으로 빨려 들어, 본의 아니게 남의 사생활에 끼어들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들리는 내용이 열에 아홉은 위급상황이나 생계형의 급한 일이 아니다.
하면, 이웃 일본은 어떨까? 지하철을 타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으레 휴대폰 전원을 끄거나 묵음으로 바꾼다. 혹, 걸려온 전화를 꼭 받아야 할 경우, 멈추는 역에 내려 통화 후 다음 차를 탄다. 또한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출입문 양쪽에 대각선으로 줄을 서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내리는 사람들의 공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라는데, 몸에 밴 타인을 위한 배려의 미덕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본이 어디에 있을까? 그들 사회윤리의 핵심에는 ‘남에게 끼치는 폐’를 뜻하는 ‘메이와쿠(迷惑)라는 덕목이 중심에 있으며 그 뿌리는 가정교육이다. 이 교육은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이어지며 대중교통의 예절부터, 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맹목적인 일본 찬양이 아니다. 그들 대중 속의 생활문화 가운데 배울 가치가 있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온 ‘매슈 포틴저’가 “한국의 부드러운 정권 교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마치 민주주의가 쉬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질투가 난다”라고 했다. 립서비스 차원의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대선을 통해 한층 성숙해진 우리의 정치의식이 세계인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이 아닐까? 이참에 남을 배려하는 대중교통문화도 한 차원 껑충 높아져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 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