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보다 포 김(Po Kim)이라는 미국명으로 더 잘 알려진 작가 김보현. 1955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땅으로 떠나 완전히 노년에 접어 든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고국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알리기 시작했던 유랑의 작가. 김보현의 인생을 살펴보노라면 안소니 퀸이 열연했던 ‘25시’(앙리 베르누이 감독, 1967년작)의 장면들이 연상된다. 영화 속에서 안소니 퀸은 루마니아의 농부 요한 모리츠로 분했다. 너무 아름다운 부인을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중간에는 게르만족의 순수혈통을 지닌 사람으로 나치의 선전전에 이용당하고 종국에는 부역의 대가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는 요한을 통해 전쟁이 어떻게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할 수 있는가를 통렬하게 보여주었던 영화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에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김보현의 인생 유전 역시 한국판의 ‘25시’라고 할 만하다.
▲ 김보현, '피망', 종이에 색연필, 75x85cm, 1975.

한국전쟁은 김보현을 이념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전쟁 시기, 까닭 없이 좌익혐의로 연행되거나 우익혐의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런 불안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1955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어바나 캠퍼스의 교환교수로 한국을 떠난 뒤 미국에 정착해 버렸다. 이후 불법체류자, 동양인, 예술가의 방외자로서의 삶을 개척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뉴욕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세계 현대미술의 동향을 즉각적으로 목격하고 수용할 수 있었던 김보현은 추상표현주의적 화풍과 극사실주의적 화풍을 오가는 무애의 삶을 영위했다.

이 그림은 뉴욕화단에서 그에게 화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준 1970년대 중반의 색연필 정물화의 하나이다. 흰 종이위에 두 개의 피망이 놓여 있다. 하나는 꼭지부분을 중심으로 그려졌고 다른 하나는 꼭지의 반대방향을 중심으로 그려졌다. 이 두 개 피망의 존재감을 드러내 주는 것은 그것들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표시해 주는 옅지만 섬세한 그림자뿐이다. 서양의 정물화에서 보여 지는 정물들이 주변의 사물들 혹은 공간의 구성에 힘입어 자리 잡는 것에 반하여 김보현의 정물들은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 독특한 그림들에 뉴욕의 평론가인 셜리는 김보현이 사물들을 명상의 대상으로까지 격상시켜 ‘형태와 존재성의 검증’을 이루어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동양에서 온 방랑자, 그의 인생역정과 정신세계가 이루어 낸 놀라운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최은주 경기도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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