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17) 경기, 근대의 시선속으로



▶ 근대적인 시선 속에 ‘은둔ㆍ금단의 나라’

17세기 전반, 뜻밖에 경기인(京畿人)을 만났던 일부 블론디들은 조선에서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인들도 파란 눈을 가진 그들이 어색했다. 하멜이 탈출한 후, 2백여년이 지나 경기인들은 다시 찾아온 그들을 만나야했다. 앞서의 예기치 못은 만남을 후회라도 하듯 그들은 준비된 소수의 메이저리거로 돌아왔다. 그들의 “조선 원정(Korea Expedition)”을 겪은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했다.

조선은 1882년 미국을 선두로 이후 영국ㆍ러시아ㆍ이탈리아ㆍ독일ㆍ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맺어 중화(中華)를 넘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들어갔다. 선교ㆍ외교ㆍ교역 등을 위해 찾아온 블론디의 낯선 시선은 우리를 대체로 제국주의의 침탈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규정했다. 오페르트(Ernst J. Oppert)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새비지-랜도어(A. Henry Savage-Landor) 등이 조선의 이미지로 규정한 ‘금단(A Forbidden)’, ‘은자(The Hermit)’, ‘고요한 아침(Morning Calm)’ 등에 그 시선이 담겨 있다. 섞이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다는 타자적인 관점이다.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힘의 메이저리거로 자리했다.



▶ 낯선 시선 속의 경기(京畿) 여행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노출된 조선은 어떤 이에게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무슨 대인국과 같은 사나운 나라”로 비쳐졌다. 어떤 이는 조선에 발을 디딘 순간을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의 주인공처럼 너무 환상적이고, 너무 불합리하고, 너무 정 떨어지고, 너무도 기괴해, 몇 번이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자문”했다. 이색적이고 진기한 것과 당초부터 거리가 있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흰옷(白衣)’를 보고 “흰 비석이 늘어선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온돌방에서의 생활을 ”오븐에서 뜨거워 어쩌지 못해 튀어 오르내리는 노르스름한 빵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였던 게일(James Scarth Gale)에게 선비는 친근함을 가진 인간 수수께끼(A mystery of humanity) 같은 문명에서 남아있는 가장 독특한 존재로 다가서기도 했다.

이방인의 외출은 서울에서조차 조심스러웠다. 1888년 봄에는 “파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들의 눈알을 빼어다가 안경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다가 양약을 만들어 판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선을 알기위해 곳곳을 여행했다. 1892~1898년 간행되었던 기독교 월간 영문 잡지인 《한국총보 The Korean Repository》는 비교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난 시선에서 조선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그들의 교통수단은 가마와 말이나 당나귀, 걸어가는 것, 세 가지였다.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한 자국에서의 속도감과 편안함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가마는 비좁은 상자 속에 들어앉아 있어야하는 불편함 투성이였다. 자연히 말과 당나귀를 이용해 짐을 꾸리고, 이들을 안내하는 조선인을 걸리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비가 올 경우, 진흙과 흙탕물로 뒤범벅이 된 도로를 찾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한양의 황량한 모래 언덕에서 소말리아의 어느 해안을 떠올렸다”는 프랑스 외교관 프랑뎅(Hippolyte Frandin)의 말처럼 조선 각 곳의 정체성과 특성은 그들에게 이해될 수 없었다. ‘경기(京畿)’를 여행하면서도 그곳은 ‘경기’가 아니라 눈에 성긴 조선이었고, 또 다른 한양이었다.



▶ 전형적인 조선의 마을(Chosen In Picture)

1892년 1월 게일 일행은 고양, 임진강, 송도(개성)를 여행했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로 비친 고양을 지나, 임진강에서 예언자로서 율곡 이이의 이야기를 접했다. 그가 매일 화석정 안팎을 기름칠하여 건물이 불에 잘 탈 수 있도록 준비했는데, 임진강에서 임진년의 난리(임진왜란)를 대비했다는 것이다. 결국 율곡은 이 일을 형에게 맡긴 채 죽었고, 후에 왜군에게 쫓겨 어두운 산속을 헤매던 국왕 선조가 임진강가에서 타오른 화석정 불길 덕에 길을 찾아 살았다는, 죽은 율곡이 국왕을 살린 얘기다.

송도에 도착한 게일은 서낭당을 마주했다. 길가의 나무에 매인 더러운(?) 천조각과 장식물, 그 아래에 돌무더기가 있었다. 악귀들이 사람들에게 달라붙지 못하게 액을 막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뿌리부터 껍질까지 나무에는 온통 조선의 모든 귀신들이 살고 있었다. 일행을 안내하던 조선 소년은 어느 날 밤에 집 뒤켠 늙은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귀신들이 창문으로 모래를 던져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잠깐 잠을 추스르고 밖에 나가 불빛을 비춰보니 여기저기 흩어진 나뭇가지만 있었다.

게일은 새해에 길을 따라 50~60㎝ 정도 사람모양의 짚인형을 만들어 세워두는 풍습을 보았다. ‘제웅’ 또는 ‘재웅’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형 안에 소유자 이름과 소원지, 그리고 몇푼의 돈을 넣어 두었는데, 액막이로 태워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가끔 몇푼의 돈을 위해 자신들에게 재웅을 달라는 떠돌이 거지들에게 이를 양보함으로써 영혼의 평화를 맞바꾸기도 했다. 그들이 만난 주막의 여주인은 좋은 인상이 아니었던듯하다. 날카로운 목소리, 담배냄새, 더러운 옷. 그나마 서비스를 받으려면 ‘빨리’라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조바심내지 않으며 참아야 했다. 현재 우리의 이미지 중에 하나인 ‘빨리빨리’가 이땐 낯설기만 했다.

개성이 상업도시로 특징된 이유는 인삼에 있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인삼은 중국에서 그 무게만큼 금으로 거래된다”고 했다. 영국 출신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극동지역에 며칠간 머물러 본 사람이면 누구나 만병통치약인 인삼 뿌리와 그 효험에 대한 극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영국 약국에 있는 어떤 약도 극동에서의 인삼 평판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인삼은 조선의 수출품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며, 또 세입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왕실에서는 왕실 치료를 맡고 있던 미국 출신 알렌(Horace Newton Allen) 몰래 왕세자 순종에게 인삼을 먹일만큼 그 신뢰가 한이 없었다. 귀중한 작물을 재배하는데 많은 정성이 들었다. 간혹 손 타는 것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 원두막과 높은 담을 설치한 모습이 영국 외교관 칼스(W. R. Carles)에게 포착되기도 했다.

1898년 6월. 어느 서양인 일행이 강화도에 들어섰다. 그들이 본 강화도는 인구 5만여 명 정도로, 조선 최고의 농촌이었다. 여기서 조선인의 전형이었던 농부는 바빴다. 그들은 거의 다른 곳을 가보지 못했고, 참을성이 많았다. 여가에 신발ㆍ돗자리ㆍ죽제품 등을 만들었고, 여성은 면ㆍ비단ㆍ마 등을 만들었다. 목수ㆍ대장장이ㆍ지관 등도 모두 농부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는 이틀에 한 끼, 또는 풀죽으로 끼니를 이으며 가을까지 기다려야했다. “제사지낼 때 차린 음식을 조상이나 악귀들이 실제로 먹어치운다면 기꺼이 제사를 끊을만했다.” 5일장에 가서 때론 술에 취해 싸움을 하거나, 모든 산을 점령한 집안무덤을 둘러싼 송사, 논물 등과 관련한 다툼은 기분전환에 속한 일이었다.

1890년. 비숍은 경기 남부를 여행하다가 장호원의 한 양반집에 들렀다. 각 방마다 프랑스 시계가 걸려 있었고, 응접실에는 화려한 독일제 거울과 카펫, 외제 테이블과 벨벳 의자가 놓여 있었다. 주인은 18세의 젊은이였는데, 화려한 다이아 반지를 끼고 외제 담배를 피우면서 부와 신분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미 빠르게 서양식 가구와 생활 풍조가 지방의 고위관료들에까지 전파되었다.



▶다름에 대한 이해, 소통

정보를 거의 가지지 못한 이역에서의 먹거리는 우선 경계심을 깔고 접하는 현지를 인상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 여행과 생활에서의 현지식(現地食)은 다르다. 여행에서의 낯선 맛은 별미로 다가올 수 있지만, 생활에서는 겪어내야 할 큰 고충이다. 186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음식에 대한 평이다. “조선음식은 대단한 조리법을 요구하지 않고, 거의 동일한 식단이다. 검은콩을 약간 섞은 쌀밥이나 보리밥 조금, 계절마다 산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약간의 푸성귀와 풀뿌리가 소금없이 삶는 방식으로 조리되는 것이 전부다. 고기는 대부분 짐을 나를 수 없는 늙은 소이기 때문에 먹기보다 치아로 고기를 공격하는 일에 가깝다. 최고의 양념은 식욕으로, 이것만 있다면 프랑스 요리가 부럽지 않다.” 먹거리는 선교를 위한 일상적인 고난 중에 하나였지, 삶의 구성요소가 아니었다. 그들이 건넨 스테이크를 받아든 조선인 역시 그저 핏기가 가시지 않은 매스꺼운 고깃덩어리에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음식에 큰 어려움이 없다. … 개고기를 맛보았는데 괜찮다”. “여기에는 식탁이 없다. 밥이 빵을 대신한다. 요새는 채소가 없는 탓에 고사리, 접시꽃 등 이름 모를 식물을 먹는다. 하지만 매우 건강하고 식욕이 좋아 잘 먹는다”고 안심시켰다. 그들은 육류 일부와 계란 등을 제외하고 밀가루ㆍ건포도ㆍ크래커ㆍ햄ㆍ차ㆍ분유ㆍ설탕ㆍ커피ㆍ샴페인ㆍ포도주 등을 모국이나 일본, 청나라 등에서 수입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3개월, 런던은 6개월, 상해나 일본은 비교적 신속하게 배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침식사는 쌀밥과 소금에 절인 냄새 지독한 배추와 무, 구운 생산 한 조각, 고추장 등뿐이었다.

조선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경계심도 줄어들었다. 비숍은 영국 공사관 근처에 있는 한국 전통가구를 제작하는 ‘장롱거리(Cabinet Street)’에 매료되었고, 고약한 김치냄새에 넌덜머리를 내던 알렌은 자신을 ‘김치를 즐겨먹는 극소수의 외국인’이라고 밝혔다. 점차 지방 곳곳에서 의류·사탕·과자·담배·성냥·비누·칼·못·거울·등유 등 각종 외제품이 팔렸다. 점차 문화접변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조선에 익숙해지는 동안, 우리도 치즈를 맛본 후 매스꺼움을 달래려고 밥과 김치를 마구 퍼먹지 않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허연 피부색과 이상한 옷차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겁먹지 않을 시간 말이다.

조선에 대한 블론디들의 근대적인 시선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통한 잘못된 정보의 탓도 있다. 조선은 그들에게 익숙한 ‘문명’ 밖의 야만이었다. “비누 향내를 맡고 떡인 줄 알고 먹어버린” 캄캄한 ‘비문명의 공간’이었다. 때론 인종간의 우월의식까지 배어있다. 그 배경은 익숙하지 못한 낯섬에 있었다.

현재 우리는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 매일 세계와 우리 사회에서 낯선 시선을 접한다. 그리고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내고, 마치 타자적인 관점이 객관적인 것인 양 고민(?)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배려와 소통, 여유와 느긋함이 답이다. 백여년전 짧은 근대를 겪으며 몸부림쳐 얻은 경험을 폐기할 수 없다.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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