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생가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8에 위치한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지은 집이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집의 규모는 53칸인데 영조는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축 비용을 분담하여 지어주도록 하였다. 집을 지을 때도 궁궐 건축을 담당하는 경공장의 목수들을 파견하였다. 그래서인지 추사고택은 격조가 있어 보인다.

추사의 조상들은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서 살았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경주김씨) 생가가 그곳에 있는데, 김흥경의 증조부인 김홍욱이 효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이다. 정순왕후는 추사의 11촌 대고모가 된다. 김한신이 예산에 집을 지은 것은 아버지 김흥경의 묘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김한신과 화순옹주에게 예산의 집뿐 아니라 한양에도 월성위궁을 하사하였다. 궁이란 궁궐을 나온 왕실 가족이 사는 집을 말한다. 조선시대 웬만한 사대부가는 한양과 향촌에 각각 집이 있었다. 벼슬을 하면 한양에 머무르다 물러나면 향촌에 기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예산에서 거의 살지 않았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다. 그녀가 둘째 딸이라고는 하지만 장녀인 화억옹주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어 사실은 장녀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결혼할 당시 나이가 불과 13세였다. 그런 그녀를 영조는 늘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화순옹주는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않고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한신이 병사하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자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친히 딸의 사저를 찾아가 간절히 만류했다. 이때 사저는 월성위궁을 말한다. 영조는 죽은 이들에게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입적토록 하여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그가 곧 추사의 할아버지다.

김이주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추사는 김노경의 아들이다. 백부인 김노영은 아들이 없자 추사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추사가 월성위 집안의 종손이 된 이유다. 추사가 예산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생부인 김노경과 생모인 기계유씨가 결혼하여 월성위궁에 살면서 추사를 임신했다. 그런데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를 피해 예산으로 내려가 추사를 낳은 것이다. 추사는 어린 시절 한양 집에서 자랐다. 추사가 예산에 산 것은 9년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 난 64세 때였다. 그러나 곧 한양에 올라갔으며 66세 때 다시 당쟁에 휘말려 북청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난 그는 친부인 김노경의 묘가 있는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예산 추사고택은 추사가 태어나기는 했지만 산 것은 잠깐이었다.

추사고택의 현무는 고택 바로 뒤에 있는 용산(94m)이다. 이 산은 금북정맥 오서산(791m)에서 비롯된다. 초롱산(339m), 봉수산(463m), 북산(108m)을 거쳐 왔다. 산줄기 양쪽으로는 무안천과 삽교천이 흘러 신안면 하평리에서 합수한다. 두 물줄기 사이에는 용맥이 있고, 두 물이 합하는 곳에는 용맥이 멈추어 기를 모은다 했으니 바로 용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용산은 마치 작은 종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게 생겼다. 대표적인 금형으로 옥녀봉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산세에서는 왕비나 부마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옹주와 부마 묘가 이곳에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용산에서 내려 온 맥을 받아 추사고택, 김흥경 묘, 김한신 묘, 김정희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추사고택의 맥은 사당을 거쳐 내려오는데 안타깝게도 안채는 맥에서 벗어나 있다. 풍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맥이다. 기는 맥을 따라 전달되기 때문이다. 맥은 사랑채로 이어진다. 안채보다 사랑채 터가 더 좋다는 이야기다. 대개 조선 전기와 중기에 지어진 집들은 안채가 맥을 받는 곳이 많다. 후기에 지어진 집들은 사랑채가 위치하는 곳이 많다. 안채는 여성 공간이고 사랑채는 남성 공간이다. 집의 기능이 여성 중심에서 남성 중심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런 집에서는 대를 잇기가 힘들다.

오늘날 저출산 문제가 국가적 위기로 다가왔다. 가정은 물론 국가의 대를 잇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추사고택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가정이든 직장이든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만약 추사고택을 지을 때 지금의 사랑채 자리에 안채가 위치했더라면 직계손이 끊기는 화는 피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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