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빨리’, ‘안전 불감증’, ‘패거리 문화’, ‘소득 불평등’, ‘냄비근성’

대한민국 사회에 아직도 고질병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한국병’이다. 지연과 학연, 혈연으로 연결된 인맥 고리, 공직사회 부패와 비리, 정파적 후진 정치와 패거리 문화, 편의주의 행정과 인치(人治)주의 등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지난해부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는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病弊)를 그대로 드러낸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원칙은 오간 데 없고 상황에 따라 원칙이 바뀌고 잣대가 늘어나는 상황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있다. 권력에 줄대기와 대한민국을 좀먹는 측근들의 부정부패는 대한민국의 바닥을 드러냈다. 모든 원칙과 법이 만인에게 공정하고 투명하며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민주주의와 선진사회가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최우선시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이 가장 쉽게 무너지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정치다. 정치 논리라는 명분으로 원칙을 그럴 듯하게 재포장해 당리당략에 따라 바꾸는 사례를 너무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원칙 없는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정치에서 원칙이 무너지면 자기가 속한 당파나 정당에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다른 정파나 집단에는 한없이 무자비한 양극화 현상이 빚어진다. 원칙과 법치에 관한 양극화 현상이 초래되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대신 그 자리를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메우게 된다. 바로 그런 현상이 후진 정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을 원칙을 피하려 드니까 논란이 일고 사회적 쟁점이 되는 것이다. 매번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도드라지게 보이고 있는 원칙 일탈현상에 국민들은 지쳐가고 있다. 5년 또 10년마다 자리를 바꾸어가며 반대논리를 펴고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에 국민들은 정치뉴스를 외면하고 있다.

이번 인선을 지켜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망감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청문회(聽聞會)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후보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기 보다는 흠집 내기와 인신공격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해 입법부가 견제권을 행사하는 자리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대통령이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후보자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철저히 파악해서 부적격자들을 미리 걸러내야 한다는 얘기다. 국회의 관련 상임위 등 각계의 의견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고, 그렇게 한다해도 간혹 부적격자(不適格者)들이 후보자로 임명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행정부가 가려내지 못한 부적격자들을 마지막으로 걸러내야 하는 장치가 입법부의 인사청문회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청문회를 보면 여당은 후보자들의 공적과 장점을 강조하는 반면, 야당은 주로 후보자들의 도덕적 흠결을 부각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5년 또 10년마다 여당과 야당의 자리를 바꿔가며 반대와 찬성 논리를 펴고 있는 TV 속 국회의원들을 바라보면 ‘과연 국민을 의식하기는 하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훈계를 하는 식의 질문,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의혹제기, 무조건적 후보자 감싸기 등으로 일관하고 있다. 후보자들이 직무에 걸맞은 자질과 능력, 도덕성을 갖췄는지를 검증하는 건 국회의 기본 책무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빈틈없이 촘촘하게 후보자를 살펴보는 것도 당연하다. 청문회의 본령은 국정 능력과 정책 검증이다. 인사청문회에 대한 시스템 전환도 필요하다. 같은 흠결을 놓고 정권이 바뀌는 5년 또 10년마다 된다 안 된다 입장만 바뀌어 다투는 행태는 청산되어야 맞다. 이미 여야 국회의원들은 청문회 도입 이후 창과 방패를 들며 공격과 수비를 하며 인사검증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번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고,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시스템 도입을 해야 한다.

이제 청문회도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부터라도 당리당략이 아닌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청문회의 형식과 절차, 기준 등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청와대 역시 부실한 인사검증이 있다면 수용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인선을 해 나가길 기대해본다.

엄득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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