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서부 고층 아파트에서 최근 발생한 대형 화재로 최소 58명이 숨졌다.

불은 6월 14일 오전 1시쯤 런던 서부 24층 임대 아파트인 '그렌펠 타워' 4층에서 시작돼 삽시간에 건물 대부분을 태웠다.

그렌펠 타워는 지어진 지 24년이 지나 화재 위험이 컸는데도 안전장치와 관리가 허술했다.



아파트 관리소는 "불이 나면 집 안에 가만히 있으라"라는 화재대응 지침서를 2004년에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세월호 침몰 전 모든 승객은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그대로 있으라고 한 안내방송과 닮았다.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고 화재경보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2015년 리모델링 공사 당시 외벽 단열재로 사용한 인화성 알루미늄·플라스틱 복합 패널 탓에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공사비 절감에 눈이 먼 그렌펠 타워의 탐욕과 안전불감증이 참사를 빚은 셈이다.

351년 전에는 역대 최악의 화재로 런던 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로마인들이 지은 론디니움(런던 어원) 성곽 내부 도시에 불이 난 것은 일요일인 1666년 9월 2일 오전 1시쯤이다. 그렌펠 타워 발화 시간과 비슷하다.

골목길 빵집에서 시작된 불은 무려 나흘간 번져 시내 주택 대부분이 타거나 무너졌다.

군이 투입돼 화약을 터트려 방화로를 만들고 강풍이 잦아든 덕에 불길을 간신히 잡았지만 피해는 참혹했다.

생폴 성당을 비롯한 교회 87채와 주택 1만3천200여 채가 소실됐다.

이는 전체 건물의 약 80%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모든 주택이 초토화한 셈이다.

불이 나자 시민들은 진화에 나서기는커녕 귀중품이나 가재도구를 챙겨 달아나기에 바빴다.

한심하게도 소방수들은 화재 현장 주변에서 수수방관했다.

민간조합 형태로 운영된 소방수들은 불난 빵집이 조합에 가입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런던 주택가가 소형 목재 가옥으로 다닥다닥 붙을 정도로 조밀했던 것도 화재 피해를 키웠다.

런던은 1632년 대형 화재를 겪고서 목조건물이나 초가지붕을 금지했으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든 빈민들이 비싼 벽돌이나 석재로 집을 지을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런던이 단기간에 인구 50만 명을 넘을 정도로 급팽창하자 불법 목조건물이 도시 곳곳에 어지럽게 들어섰다.

런던은 16세기 후반부터 급성장해 100여 년 만에 인구가 무려 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당시 런던은 미국 월가와 함께 세계 금융 중심지로 유명한 현재 런던시티에 해당하는 곳이다.

대다수 귀족이나 부자는 한적하고 깨끗한 곳에 석재 저택을 지은 덕에 런던 대화재 당시 화를 면했다.

런던 시 당국의 초기 대응은 매우 부실했다.

강풍이 불 때에는 바람 방향 건물을 폐쇄하고 해체함으로써 방화로를 만들어 확산을 막는 게 상식인데도 런던 시장은 이런 조치를 온종일 외면했다.

저녁이 돼서야 군을 투입해 대대적인 건물 해체에 나섰으나 그때는 이미 화염이 런던 중심가를 덮친 뒤였다.

공식 사망자는 9명으로 발표됐으나 정확한 집계는 아닌 듯하다.

석조 건물마저 태울 만큼 고열을 낸 불길에 불법 체류 빈민이나 노숙자가 희생됐을 개연성이 크다.

이들은 시 당국에 등록되지 않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면 사망자 명단에서 누락된다.

졸지에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앉은 시민들이 분노하자 정부는 엉뚱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몰아 처형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 등 재앙이 생길 때마다 희생양을 만들던 악습이 화재 현장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방화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로버트 허버트라는 프랑스인이다.

두 다리가 불편한 허버트는 로마 교황의 사주를 받아 빵집에 폭발물을 던져 불을 내고 달아난 혐의를 받았다.

방화 증거가 없고 목격자 진술 신빙성이 매우 떨어졌는데도 허버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대지진으로 10만 명 이상 숨지고 건물 약 30만 채가 파손되자 가짜뉴스가 나돌았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색출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만행을 저질렀다.

밧줄로 묶어 강에 던지고 헤엄쳐 나오면 도끼로 찍어 살해했다. 임신부 배를 칼로 찌르고 산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태워 죽이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인 사망자가 2~3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 희생자는 6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런던 대화재 방화범으로 몰린 프랑스인이 누명을 벗은 것은 처형 후 320년 만이다.

처음 불이 난 빵집 주인 토마스 페리니의 후손이 경영하는 런던 베이커가 1986년 침묵을 깨고 런던 대화재 진상을 공개했다.

빵집 여직원이 화덕에서 일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 대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런던 대화재는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1657년 도쿄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화재 사건으로 꼽힌다.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많은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민간조합 소방제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방차를 갖춘 근대 소방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템스 강 연안 건축을 금지하고 벽돌이나 돌 주택만 허용했으며 매연을 배출하는 양조나 염색 공장은 도심 밖으로 내쫓았다.

현대식 화재보험회사도 탄생했다.

대재앙 15년 만인 1681년 의사 출신 건축가인 니콜라스 바본이 영국 최초 화재보험회사를 설립한다.

판잣집이 난립하던 도시 공간을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화재보험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시민들이 화재를 계기로 죽음 공포에서 벗어난 것은 최대 소득이다.

유럽인 약 2천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화재 1년 전인 1665년 런던에서 다시 창궐해 무려 6만8천여 명이 숨졌다.

그해 4월부터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가며 죽는 환자가 속출해 런던 도심에 시체가 즐비했고, 악취가 진동했다.

시 당국은 큰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집단으로 파묻는 것 외에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시민들은 자구책으로 소변 목욕이나 꽃향기 요법을 써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흑사병 원인을 혈액 오염으로 진단한 의사들이 정맥피를 빼내는 치료를 하다가 과다 출혈이나 빈혈로 환자가 죽는 사례도 빈번했다.

유대인과 노숙인, 집시는 희생양이 됐다. 마을 우물 등에 독을 타거나 병균을 퍼트린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개와 고양이는 떼죽음을 당한다.

흑사병을 옮기는 동물로 의심받아 고양이 약 20만 마리와 개 약 4만 마리가 도살됐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진짜 전염 매개체인 쥐가 대량 번식을 하면서 흑사병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흑사병 피해도 신분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서민들은 성 밖으로 피신하려다가 시 당국의 불허로 꼼짝없이 갇힌 탓에 피해가 컸다.

성 밖 출입에 필요한 건강증명서를 시 당국이 귀족이나 부유층에만 발급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 8세 왕이 사냥터로 쓰던 하이드 파크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으나 임시 흑사병 피신 캠프로 활용된 것을 계기로 시민 휴식처로 바뀌게 된다.

지구 종말을 몰고 오는 듯했던 흑사병은 이듬해인 1666년 런던 대화재를 계기로 감쪽같이 사라진다.

런던 판잣집을 맘대로 돌아다니며 흑사병 전염 균을 퍼트리던 쥐들이 모조리 불에 타 죽은 덕분이다.

그렌펠 타워 화재는 정부와 관리회사 안전불감증이 피해를 키웠다는 점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조기 진화에 실패한 런던 대화재와 닮았다.

저층 불길이 외벽을 타고 순식간에 고층으로 번진 것도 골목길 빵집 화염이 목조 주택가를 삽시간에 태운 351년 전 상황과 유사하다.

런던 대화재가 흑사병을 없애는 효자 역할도 한 데 반해 그렌펠 타워 화재는 임대주택 서민들의 꿈과 의욕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은 큰 차이점이다.

우리나라도 30층 이상 고층건물이 2천500개 동을 넘어 대형 화재 위험이 크다.


노후 고층건물에는 방독면·조명등·스프링클러·비상경보 기능이 부실하고 방화구역과 피난통로도 취약하다.

화마를 멀리하려면 그렌펠 타워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전국 노후 고층빌딩에 대해 현미경 점검을 하고 위험 요인을 서둘러 제거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화재예방 지식을 쌓고 안전의식을 생활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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