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기획 STORY] 이재원 SK와이번스 선수

2005년, 인천고 졸업반이던 이재원(29) 선수는 동산고 좌투수 류현진 선수 대신 SK 와이번스에 1차 지명됐다.

2006년 프로에 데뷔한 그는 “공격력은 이만수, 머리는 박경완, 파이팅은 홍성흔처럼 되고 싶다”며 신인의 패기를 보였다.

그러나 프로 세계는 만만치 않았다.

주변에서 쟁쟁한 선배들의 대를 이을 대형 포수로 성장할 것을 기대했지만 대수비와 대타 인생을 살았고, 군대도 다녀오는 등 순탄치 않은 야구인생을 살았다.

어느새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재원 선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가 못한다고 비난을 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언젠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망이부터 몸에 밴 습관까지 야구만 잘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꿨다.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 2014년, 프로에 데뷔한지 8년 만에 풀타임 주전 포수로 중용되고 3할 3푼 7리의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특히 2015시즌엔 포수로서 100타점을 해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이재원 선수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만났다.

-야구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야구장을 많이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야구선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진지하게 선수가 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반대가 심했다. 특히 어머니 반대가 심했는데, 내가 외아들이다보니 운동선수를 하면 고생할까 걱정이 많으셨다. 어느날 어머니가 나를 불러서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되겠냐고 부탁까지 하셨다. 그래도 야구가 하고 싶어서 계속 졸랐다. 3년간 조르니까 허락해 주시더라.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고 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포수는 체력부담이 큰 포지션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수를 선택한 이유는.

“처음 야구를 시작하면 대부분 투수 아니면 타자인데, 덩치가 크다 보니 감독님이 포수를 맡겼다. 그런데 하다보니 매력이 있었다. 대부분 포수를 하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는데 포수는 팀이 이겼을 때 성취감이 정말 컸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포수를 하고 있다.”

-야구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이 포수를 기피한다고 하는데 포수의 장점은.

“포수가 힘든 것은 사실이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2~3배 힘들다. 가끔 너무 힘들어서 정신을 못차릴 때도 있다. 그만큼 부상 위험도 크다. 그러나 포수는 외야수와 내야수보다 프로에서 활동 영역이 넓다. 프로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게다가 요즘엔 덩치 큰 포수보다는 덩치가 작고 마른 포수도 많다. 실제 마른 포수가 유리하기도 하다. 덩치 큰 포수가 힘은 좋지만 작고 날씬한 포수들은 민첩하다. 지금은 다양한 선수들이 포수를 할 수 있어 많은 어린 선수들이 포수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조범현, 김경문 감독 등 포수 출신 지도자가 많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있는지.

“포수는 시야가 넓다. 포수는 유일하게 홈플레이트에 앉아서 선수들을 관찰하는 포지션이다. 그만큼 수비를 하고 있는 8명의 선수들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포수 출신 지도자는 선수들을 잘 관찰한다. 또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표정, 심리를 잘 살피고 분석해 낸다. 포수들은 선수들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이런 점이 포수 출신 지도자의 강점이라 생각한다. 아직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선수생활에 전념하고자 한다.”

-학창시절 얘기를 해보자.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엄청났다던데.

“학창시절 내가 가는 곳은 학교와 집이 전부였다. 어디를 돌아다니거나 놀아본 기억이 없다. 야구는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학교와 집을 부모님이 매일 데려다 주셔서 야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밥 먹고 야구만 했다. 전지훈련을 갈 때면 어머니가 같이 따라 오셨다. 외아들이다 보니 그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부담스러워 하는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일 오시니까 당연히 오시는것처럼 느껴졌고 부담보다는 오히려 감사했다.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항상 야구도 더 잘되더라. 부모님이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류현진 선수와 함께 프로 입단 때부터 주위 기대가 너무 높았는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나.

“없다면 거짓말이다. 스트레스가 있었다. 현진이가 워낙 잘했고 난 막 시작하는 신인이었다. 현진이가 괴물같이 야구를 잘하는데 나는 딱히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래서 현진이는 현진이 대로 하고 난 나대로 열심히 준비했다. 군대 다녀오고 난 후 국가대표도 하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고교때부터 거물 신인으로 평가 받았다. 고교 야구가 프로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점은 정신 상태다. 즉, 고교 야구에서는 기술로도 승부가 가능하지만 프로에서는 흔히 말하는 멘탈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얼만큼 야구를 자신있게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또 관중들과 선배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아야 한다. 멘탈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기술적으로는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도 성공한다.

-너무 큰 기대치 때문인지 2010년 상무 입대 전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팀이 잘하고 있었고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다. 지금은 많이 아쉬움을 느낀다. 당시에 더욱 열심히 했다면 지금 더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20대 초반에는 실력도 부족했고 멘탈이 약했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기다림 끝에 주전 포수로 자리매김했다.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원래 성격이 어떤 일이 생기면 피하지 않는다. 도망가면 지는거라 생각했다. 야구를 못한다고 피하면 지는거고 또 못한다고 누가 비난을 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언젠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또 긍정적으로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주전으로 뛰지 못해도 이 상황을 피하지 말자. 버티자. 그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했다.”

-2014년 놀라운 성적을 보여줬다. 비결이 무엇인가.

“잘해야 겠다는 생각이 컸다. 방망이부터 기술적인것까지 모두 바꿔보자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부상으로 2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컸다. 더 이상은 뒤로 밀려나서는 안되겠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군대 갈 때는 편하게 다녀오자는 마음이었는데 제대를 하고 나니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꾸고 다시 시작하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결혼을 하고 최근에는 아이까지 가졌다. 이재원 선수에게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만난지 10년만에 결혼했다. 그전부터 결혼하려는 마음은 있었는데 우연히 야구 성적이 좋을때 결혼하게 됐다. 지금 와이프는 어렸을적부터 같은 아파트 살던 친구다. 어머님과 장모님이 같은 헬스장 다니면서 친해졌고 와이프와 나도 친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로 지내다가 20살때 야구장 한번 놀러오라고 했는데 마침 경기가 잘 풀렸다. 계속 후보 생활만 하다가 와이프가 놀러온 날 주전으로 활약했다. 그때부터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아이는 결혼하자마자 가지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 노력(?)을 많이 했다. 원정 경기도 많아서 생각처럼 잘 안됐다. 난 외동 아들이라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 되는대로 낳으려고 한다. 내 아들이 야구한다고 하면 시킬 생각이다. 와이프는 무조건 야구선수로 키운다고 했다.”

-다시 선수생활에 대해 묻겠다. 포수 이미지를 각인시킨 시즌은 언제인가.

“지난해가 이재원이라는 포수에 대해 알린 시즌이다. 그전에는 포수도 했지만 지명타자로 많이 활동했다. 참 오래 걸린것 같다. 10년은 걸렸다. 그래서 20대 초반이 너무 아쉽다. 그때 더 기본기를 다져놨다면 지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부상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고 사는게 부상관리에 대한 비법이다. 나는 야구장과 집 외에는 다른 곳에 가지를 않는다. 집에 가서도 야구 영상을 본다. 오로지 야구에만 힘을 쏟으면 부상이 덜 생기는거 같다. 풀타임 경기 출장을 3~4년 정도 소화하니까 부상관리 요령도 생겼다.”

-야구를 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나.

“야구를 안했으면 내가 이렇게 돈을 벌 수 없었을 거다.(웃음) 다시 태어나도 야구 할꺼다. 물론 야구선수로 성공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그래도 다시 할꺼다. 물론 슬럼프가 오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과 와이프가 많이 도와줬다. 주변에서 항상 밝게 행동하라고 얘기해 주신다. 또 힘들어도 잘 지나가려고 하면 그게 쌓여서 잘 될거라 말씀해 주신다. 지금 잘 안된다고 도망가서는 안된다. 그리고 프로선수는 도망가고 싶다고 갈 수도 없다. 힘든 일이 있으면 부딪혀서 이겨내야 한다. 지금 팀이 잘하고 있으니 동료들과 열심히 재밌게 경기하려고 한다.”

-2018시즌이 끝나면 첫 FA 자격을 얻는다. 구상해 둔 그림이 있나.

“나는 인천에서 계속 뛰고 싶다. 인천 출신이고 다들 응원해 주시니 힘이 난다. 또 인천에서 첫 지명됐고 인천에서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구단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야구계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 보자. 퇴근 프로야구 선수들도 노동자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 야구계는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선수들의 정신력이 약해진 부분도 있다. 또 친구 중에 아마추어 선수단 코치가 있는데 훈련만 하려고 하면 선수 부모님들이 와서 간섭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야구 관계자들이 많은 논의를 지속해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선수로 진입하는 문이 너무 좁다. 프로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재능 있는 선수들을 보면 항상 아쉬운 점이 있다. 어떤 선수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어떤 선수는 기술이 부족하다. 모든 선수가 엄청난 노력을 한다. 또 모든 선수가 프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특색을 살려야 1군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잘하는 선수는 슈퍼스타로 불린다. 그런 선수는 전세계 1%가 되지 않는다.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면 자기만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야 한다.”

-반드시 이뤄내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일단 포수로서 팀 우승을 이끌고 싶고 또 골든글러브를 타고 싶다. 국가대표 우승은 해봤다. 그리고 딸을 꼭 낳고 싶다. 이번에 가진 아기는 아들인데 딸을 낳을때까지 계속해서 아이를 가질 생각이다. 지금은 야구만 생각하고 있어서 야구와 가족외엔 다른 생각은 안한다. 앞으로 계속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조기정기자/ckj@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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