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추사 김정희 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묘는 추사고택 옆에 있다. 묘지에서 주변 산세를 살피면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편안하다. 이곳에 묘가 있으니 음택이다. 만약 집을 지었다면 양택으로도 손색이 없는 자리다. 풍수에서 양택과 음택의 입지가 다르지 않다. 똑같은 땅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살면 양택지다. 땅을 파고 죽은 사람을 묻으면 음택지가 된다. 만약 명당자리에 있던 묘를 이장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면, 묘가 있던 자리의 동과 호가 명당 아파트가 되는 것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음각되어 있다. 김정희는 호가 2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많다. 그중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 가장 유명하다. 추사는 젊었을 때부터 말년까지 즐겨 사용하였다. 완당은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완원(阮元)을 만나고 나서 그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김정희의 글씨를 추사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추사라는 호가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묘에는 추사와 두 부인이 함께 묻혀 있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인 한산이씨와 결혼하여 금슬이 좋았지만 20살의 나이로 사별했다. 23세 때 두 살 아래인 외암마을 예안이씨(외암 이간의 증손녀)와 재혼한다. 추사는 예안이씨와도 금슬이 좋았다. 추사가 관직이나 귀양살이로 떠나 있을 때 늘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현재 전해지는 것만 40여 통이 넘는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다. 입맛이 까다로운 추사는 제주도의 음식이 짜고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민어나 어란 같은 좋은 반찬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자 부인은 철마다 반찬을 손수 챙기고, 의복을 마련하여 늦지 않게 보내주었다. 그러나 유배 2년째 되는 해 부인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추사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도망처가(悼亡妻歌)’는 심금을 울린다.

이곳 묘는 본래 첫 부인인 한산이씨만 묻혔다. 추사와 예안이씨는 과천에 묘가 있었는데 1937년 이곳으로 이장하여 세 명을 합장한 것이다. 묘역은 정비사업을 하면서 본래 지형이 많이 변형되어 혈증을 살피기 어렵다. 다만 묘 바로 뒤 볼록한 입수도두(入首倒頭)는 원래 지형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입수도두는 용맥을 따라 전달된 생기가 혈로 들어가기 앞서 모인 곳이다. 기가 모여 있기 때문에 볼록하다. 이로 보아 추사 묘가 진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입수도두에 서서 뒤쪽을 보면 용맥이 구불구불하게 내려와 추사 묘까지 이어진다. 이를 입수룡이라고 하는데 탯줄에 비유된다. 현무봉은 어머니이고 혈은 태아라면, 입수룡은 탯줄이고 입수도두는 태아의 배꼽에 해당된다. 탯줄을 통해 모체의 양분이 태아에게 공급되듯 입수룡을 통해 현무봉의 기가 혈에 전달되는 것이다. 입수룡의 변화가 활발하면 용맥의 기가 세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가 없으면 죽은 맥이다. 추사 묘의 입수룡은 마치 뱀이 기어 내려오듯 상당한 변화를 한다. 큰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대혈로 볼 수는 없으나 중혈에는 해당한다.

앞의 안산은 낮은 봉우리로 순하고 부드럽다. 좌청룡은 추사고택이 있는 능선이고, 우백호는 추사기념관 쪽의 능선이다. 모두 이곳을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묘 앞에 펼쳐진 들판을 명당이라고 하는데 평탄하다. 여러 곳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이를 풍수 고전에서는 ‘육곡구수(六谷九水)가 취합당전(聚合堂前)’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많은 물들이 집 앞 명당에 모여야 좋다는 뜻이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명당의 물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수구는 자물쇠로 잠그듯 좁아야 좋다. 이곳은 물이 좌측으로 흘러가는지, 우측으로 흘러가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구가 좁다.

아쉬운 것은 추사의 두 부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묘가 좋더라도 후손이 없으면 발복을 받을 수가 없다. 추사에게는 기생 초생에게 낳은 김상우(1817~1884)·김상무(1819~1865) 두 아들이 있었다. 기생 초생은 추사를 사모한 나머지 남장을 하고 몰래 추사 집에 들어와 첩이 됐다고 한다. 추사는 아들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졌다. 자신이 터득한 글씨체와 그림을 가르쳤다. 추사고택에 있는 ‘석년(石年)’이라는 돌기둥 글씨는 김상우가 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현달하지 못했고, 그 후손들마저도 손이 끊기고 말았다. 추사가 처음부터 이곳에 묻혔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