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20)대한독립, 그 길 위에 서다

▲ 안성 광복사
▶ 3·1운동 100주년을 준비하는 마음



우리는 매년 3월 1일이면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이었던 3·1운동을 기억한다. 더불어 3·1운동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유관순 누나를 떠 올린다. 하지만 정작 우리 고장의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들이 누구인지는 잘 떠올리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이제 부터는 알아야하고 준비해야 한다. 다가오는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 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2015년 정부와 많은 지자체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뜻을 같이 했다면 이젠 3·1운동 100주년을 함께할 마음과 뜻을 모아야할 시점이다.

3·1운동의 가장 격렬했던 항쟁지가 바로 경기도다. 경기 천년의 역사 속 3·1운동 100주년이 기억되길 바란다. 100년전 그날의 들불처럼 우리들의 희망이 마음에 불타오르기를 기대하면서 경기지역의 3·1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910년대 일제의 혹독한 무단통치와 식민지 지배체제는 강력한 민족적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서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저항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자주독립을 위해 전 민족이 분연히 떨쳐 일어선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서울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난 3월 1일의 만세운동의 물결은 경기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사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의 만세운동이 경기도에서 일어났다.



▲ 3·1 독립 선언서. 3·1운동을 시작하며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파고다 공원에서 정재용이 낭독했다.
▶ 강렬한 몸짓, 격전의 항쟁지 경기



경기지역의 3·1운동은 21개 부, 군 모두에서 일어났다. 경기지역에서는 3, 4월 두 달 동안 225회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이것은 일제 관헌에 의해 확인된 것으로 실제의 운동 횟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일제가 파악한 수치만으로도 경기도의 만세운동 횟수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도 가장 많아 연 15만 명에 달하였다. 특히 3월말부터 4월초 사이에 만세운동은 절정을 맞았다. 이 기간 동안 거의 매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운동양상도 계획적이며 공격적인 성향을 띠었다. 때문에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경기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개성과 수원이었다. 개성에서는 3월 1일 오후에 이미 서울의 시위 소식을 듣고 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서둘러 3일부터 약 1주일간을 두고 만세운동을 반복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방불케 했다. 또한 수원에서는 화홍문 방화수류정(용두각) 부근에서 기독교도와 청년학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3·1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 “용서도 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다”



경기지역의 3·1운동 중 일제에 대항하여 가장 공격적으로, 투쟁적이며 조직적 양상을 보였던 곳은 안성군 양성면?원곡면의 연합시위와 수원군 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이었다.

안성군의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운동은 4월 1일 벌어졌고 이틀간의 해방구를 만들었다. 원곡면과 양성면은 처음에는 각각 별도의 시위를 일으켰으나, 4월 1일 저녁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만세를 부르던 원곡면민이 일본 순사주재소가 있는 이웃 양성면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양성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에워싸고 만세를 부르며 되돌아 나오던 양성면민과 합세하면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으로 발전하였다. 2천여 농민들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고 의기충천하였다. 시위 농민은 경찰관주재소와 양성우편소를 불태웠다. 그리고 양성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비롯하여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호적원부를 꺼내어 소각하고 기물을 모두 파괴하였다. 또한 면장을 포박하고 면사무소를 불태워 버렸다. 일제 식민지배기구를 소각하면서 수탈의 근거를 제거한 것이었다. 일제 군경은 발포를 서슴지 않았다. 이미 맨 손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에 폭력적 탄압과 무자비한 살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때문에 24명이 순국하고 127명이 투옥되는 사상 최대의 희생을 낳았다.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의 3·1운동은 일제가 꼽았던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만세운동,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실력항쟁지였다.

수원군 최대의 만세운동이자 일제의 보복만행이 가장 잔인하게 일어났던 우정면과 장안면에서는 4월 3일 주민들과 천도교도가 주동이 되어 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 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약 2천 5백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우정면과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그곳에 비치된 장부와 서류 등에 방화하여 소각했다. 그런 뒤에 화수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워 버렸고, 그 곳에 근무하고 있던 악질 순사 가와바다(川端豊太郞)를 처단하였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과 김흥렬, 이정근 등의 지도층들이 사전에 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인 만세운동이었다.

수원군에서의 3·1운동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생하여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공격적인 양상을 보이고, 일본 순사들이 시위 군중들에게 처단되자, 일제는 기존의 무력을 한층 강화하며 무자비한 탄압을 감행했다. 일제는 3·1운동의 주동자 체포를 빙자하여 살인?방화?구타를 자행하며 천인공로할 학살 만행을 일으켰다. 바로 ‘제암리 학살사건’이었다. 일제는 4월 15일 3·1운동의 주동자로 인정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아놓고 20여명을 살상하고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하였다. 제암리는 시커먼 연기로 뒤 덮였고 많은 이들이 일제의 총칼에 순국했다. 또한 고주리에서 김흥렬 일가족을 몰살했다. 제암리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아직도 “용서도 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 대한독립, 그 길 위에 서서



경기지역 최대 규모의 운동은 강화군의 3·1운동이었다. 현재는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지만 당시는 경기지역이었다. 김포와 인접한 강화군의 3·1운동은 3월 18일 장날에 무려 2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평화적으로 진행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었다. 이외에도 경기도의 김포군 오라니 장터의 만세운동, 고양군의 만세운동, 광주군의 군청 앞 시위, 양주군 화도면의 만세운동, 부천군 계양면의 장날 시위, 시흥군 수암면의 만세운동, 용인군의 김량장날 만세운동과 외사면의 만세운동, 여주군 여주읍의 만세운동과 봉오산의 봉화 시위, 이천군 마장면의 만세운동과 신둔면 등 7개면의 연합시위, 양평군 양근읍 장날의 시위, 가평군의 횃불시위, 파주군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연천군 백학면과 마산면의 연합시위 등 경기지역의 3·1운동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타올랐다.

경기지역 3·1운동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다양한 계층의 참여와 주도로 거의 모든 지역주민들이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만세’만을 외쳤던 평화적 시위, 밤에 산에 올라 횃불과 봉화를 올렸던 산상시위, 돌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공격하고 일본 순사를 처단하는 강력한 무장 투쟁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지도층들이 사전에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하면서 많은 군중을 동원하였던 장터는 만세운동을 촉발시키는 주요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한마디로 경기지역의 3·1운동은 매우 조직적이며 공격적인 만세운동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경기지역 3·1운동,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길 위에 서있다. 지금은 바쁘게 지나가는 삶 속에 소리 없는 아우성만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순국선열들의 빼앗긴 들에서 외쳤던 ‘자유’와 ‘평등’을 가슴에 담는다. 현재 대한독립의 그 길 위에는 100년 전을 기억하는 자그마한 기념탑만이 지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삶은 급변하고 있다. 급격한 도시 변화 속의 행복한 일상이 100년 전 ‘대한독립’이라는 처절했던 생존의 몸부림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을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하자. 경기 천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래 백년, 아니 천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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