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김한신과 화순옹주 묘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월성위 김한신(1720~1758)과 부인 화순옹주 합장묘가 있다.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모이나 친계는 아니다.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입적하여 대를 잇도록 하였다. 조선시대는 사후에도 양자를 입적하여 제사를 모시도록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는데 특히 글씨를 잘 썼고 전각에도 솜씨가 있었다. 13세 때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부마들은 원칙적으로 벼슬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몇 대가 먹고 살만한 집과 땅을 하사받는 것이 보통이다. 김한신도 영조로부터 한양의 월성위궁과 예산 집을 비롯하여 일대의 땅을 하사받았다.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매우 좋았다. 그런데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자 화순옹주는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넣지 아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친히 월성위궁에 들려 미음을 들라고 권하였다.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한번 마셨다가 곧 토해내고 말았다. 영조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음식을 끊은 지 14일 만인 영조 34년(1758) 1월 17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조는 딸의 장례에 참석했는데 신하들이 화순옹주에게 정려(旌閭)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정려란 충신·효자·열녀 등의 동네에 각(閣)과 문(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자 영조는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굶어 죽어 정절(貞節)은 있으나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현재의 화순옹주 열녀문은 후에 정조가 세운 것이다.

묘 자리는 누가 잡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당대 최고의 지관을 보내 잡아 주도록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묘의 뒷산은 용산(74.3m)이다. 김한신·화순옹주 묘 앞에서 용산을 바라보면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옥녀의 머리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산세를 구성으로는 무곡성(武曲星), 오행으로는 금성체(金星體)이라고 한다. 풍수에서는 혈을 찾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중에서 구성심혈법(九星尋穴法)이라는 것이 있다. 산 모양을 하늘의 구성에 비유하여 설명한 이론이다. 구성이란 북두칠성 일곱 개 별과 이를 좌우에서 보필하는 좌보성과 우필성을 합한 아홉 개의 별을 말한다. 이들 별은 지상에 영향을 많이 끼쳐 지리와 인문을 관장한다고 본다.

무곡성은 북두칠성의 제육성에 해당하는 별로 복덕과 부귀를 관장하는 길한 별이다. 이 별의 기운을 받아 생긴 산은 정상이 원형이고 중간에는 지각없이 깨끗하다. 김한신·화순옹주 묘 뒷산이 바로 그 모양이다. 이러한 산의 기운을 받는 땅에서 복덕·부귀 하는 인물을 배출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무봉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은 청룡과 백호가 되는데 묘지를 안아주듯 감싸고 있다. 좌측 청룡보다는 우측 백호가 길어 여성적인 성향이 강하다. 만약 직계 후손이 있었다면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번창했을 것이다.

현무봉 중간에서 나오는 맥을 중출맥(中出脈)이라고 한다. 다른 산형에서는 중출맥이 뚜렷하게 보여야 한다. 그러나 무곡 금성체에서는 땅 속으로 맥이 이어지기 때문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속입수(續入首) 또는 월사맥(月砂脈)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혹자는 이곳을 가리켜 무맥지로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곳에서 맥을 찾는 방법은 분수령(分水嶺)이다. 비가 내린다고 가정하고 어디서 물이 갈라지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분수령을 따라 내려오면 묘 뒤 입수도두와 연결된다.

무곡 금성체의 중출맥은 멀리 가지 않고 산봉우리 바로 아래에 혈을 맺는 특징이 있다. 이때 진혈은 닭 둥지처럼 오복하게 생긴 원와혈(圓窩穴)을 맺는다. 혈은 와중에서도 약간 미돌한 부분에 위치한다. 물론 이곳에도 단점은 있다. 우선 용맥이 월사맥이라고는 하지만 힘이 왕성해 보이지 않는다. 또 청룡백호가 완벽하게 끌어안지 못해 주변이 허하다, 앞의 안산 역시 아미사인데 가운데가 갈라져 보인다. 때문에 대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무곡 금성체의 원와혈은 보기가 흔치 않다. 이런 측면에서 풍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추사고택을 답사할 때 이곳을 꼭 들려보기를 권한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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