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학창시절 한번 외워봤거나 제창해봤던 헌법 제1조 2항의 내용이다. 천만 관객을 울렸던 영화 ‘변호인’에서 대사로 나와 더 익숙하기도 하다. 그렇다. 오늘은 7월 17일. ‘제헌헌법’을 제정·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이다. 올해로 벌써 69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오늘 아침 집 앞 현관문을 열고 출근길을 나서거나, 신문이나 TV를 켜보기 전에 제헌절이라고 인식했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도 언제나 시작되는 새로운 한주 월요일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제헌절. 1948년 7월 17일 제헌 국회의원들은 밤을 세워가며 신생 독립국의 기틀이 되는 헌법을 만들어 세상에 공포했다. 헌법 제정으로 우리는 비로소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국권회복을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9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 작용의 기본원리를 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이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건국의 토대인 헌법을 만든 뜻 깊은 날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제헌절의 축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당장 달력에서 7월 17일은 더 이상 공휴일도 아니다. 10여 년 전부터 법정공휴일에서 빠져버리면서 한 단계 낮은 국경일이 돼 버렸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4대 국경일에서 한글날을 더해 5대 국경일이 됐지만 제헌절의 의미마저 혼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에서는 절반 가까운 어린이들이 제헌절과 다른 국경일과 혼동하고 있다고 한다. 기념식을 진행하지 않는 공공기관도 적지 않다.

#과연 인근 주요 나라들은 제헌절을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가까운 일본과 미국, 덴마크, 태국 등 헌법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헌법을 제정한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 공휴일로 지내고 있다. 세계 최초로 근대적 성문헌법을 제정한 미국의 제헌절은 9월 17일이다.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 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법정 공휴일로 대접한다. 주말이나 다른 공휴일과 겹칠 때는 가장 가까운 평일을 택해 연휴를 즐길 수 있도록 특별대우까지 한다.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지위를 헌법에 부여한 것이다. 일본은 현재의 ‘일본국 헌법’(이른바 평화헌법)을 제정한 5월 3일을 헌법기념일로 정해 쉬고, 이를 공포한 11월3일도 ‘문화의 날’이라 하여 별도 공휴일로 지정했다. 대만은 제헌절과 성탄절이 겹쳐 더 떠들썩하게 쉰다. 1946년 12월 25일 입법원에서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덴마크(6월 5일), 스웨덴(6월 6일), 노르웨이(5월 17일) 등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기념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제헌절을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시켰다. 5대 국경일 가운데 유일하다. 1949년부터 2007년까지 공휴일로 지정됐으나 2008년 주 40시간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공휴일에서 빠졌다. 휴일 수 증가로 기업의 생산 차질과 인건비 부담 증가 등의 이유로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쉬지 않는 국경일’로 지위를 깎아내린 셈이다. 제헌절은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뒤 민주주의 이념을 토대로 첫 국가 헌법을 제정한 역사적인 날이다. 단순히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법정 휴일에서 제외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꼭 기억해야 할 국경일이지만 공휴일이 폐지된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잊히며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제헌절 아침 분위기에 편승해 그냥 빨간 날 하나 더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공휴일은 ‘남 얘기’요, 기사 몇 꼭지를 미리 챙겨놓지 않으면 편집회의나 데스크 얼굴을 맞대기에 부담스러운 날일뿐이다. 하지만 최근 경제 활성화 등을 이유로 임시공휴일 제도를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휴일 축소를 요구한 재계가 이번에는 임시공휴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공휴일로 지정이 국경일의 의미를 찾는다는 공식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 활성화 등을 이유로 임시공휴일제도를 논의해야 한다면 제헌절의 공휴일 재논의 목소리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엄득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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