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과 원전 수용성에 대한 국가적 논의가 제대로 시작도 되기 전에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을 통과해서 도입하느냐 또는 동해 해저 파이프라인으로 들여오느냐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파이프라인을 연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일본과의 연결까지 그야말로 에너지의 백가쟁명시대가 도래했다.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을 통과해서 들여오자는 주장은 이미 20년 전부터 있었고, 수차례 추진되다가 다시 중단되기를 반복해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석유, 가스와 같은 전략적 자원은 본래적으로 국제정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나 반도체도 일부 정치에 의한 영향을 받지만, WTO 체제에 의해 자유로운 거래가 국제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석유나 가스는 그렇지 않다. 석유는 그나마 시장에 의한 거래가 상당히 가능해졌지만,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제재, 북한에 대한 석유 수출 제한 시도 등에서 보는 것처럼 여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재화이다.

천연가스는 석유보다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천연가스 개발에 수조에서 10조원에 가까운 투자비가 소요되며, 수송을 위해 많은 경우 다수의 국가를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의 건설이 필요하다. 천연가스 공급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국제정치의 산물이 된다. 파이프라인에 의한 공급이 어려운 경우, 천연가스를 액화하여 수송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액화시설, 수송선, 기화시설 등 천연가스 개발비에 맞먹는 비용이 투자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국에 천연가스가 없고 이미 발달된 천연가스 시장을 인근에 두지 못한 동아시아 국가들인 우리나라, 일본 등이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천연가스를 수입해야 한다.

불리한 현재의 구조를 깨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을 통과해서 천연가스를 들여오는 것은 어떤 위험이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이 북한 리스크다. 천연가스는 쉽게 다른 루트를 통해 들여오기 어렵다. 여유 물량이 존재해야 하고, 수송할 선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천연가스 개발은 개발 초기단계에서부터 장기의 구속력 있는 매매계약이 체결되며, 건조비가 2조원 이상 투입되어야 하는 LNG 선박을 놀려 둘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들도 특정 천연가스 매매계약에 전속적으로 투입되도록 하고 있다. 즉, 여유 선박도 부족하다.

따라서 12월부터 2월 사이의 추운 겨울, 북한이 어떤 정치적 이유로든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물리적 조치를 취한다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잠재적인 위협이지만, 천연가스 공급중단은 이보다 더 현실적이고 무서운 무기가 될 것이다. 적에게 내 목을 맡기는 꼴이나 다름없다.

러시아의 공급 안정성에 대해서도 완전히 불안감을 버릴 수는 없다. 독일 등 유럽에 오랫동안 공급해오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와 수차례의 갈등으로 벨브를 잠근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와의 경제적 관계 때문에 러시아가 벨브를 쉽게 잠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과도한 통과료를 요구하거나 또 다른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면 러시아 자체도 상당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남북러 파이프라인을 추진하는 의도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 확보와 북한에 대한 지원을 통해 북한을 개방시키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잘못하면 우리나라 에너지 안보를 극단적 위험에 몰고 가거나 북한 정권에게 안정적인 생존자금을 주는 결과에 이르게 될 수 있다.

1980년대 독일이 소비에트로부터 천연가스를 수입하려 할 때,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반대했다. 소비에트와의 적대적 관계도 문제가 되었지만, 특히 유럽이 에너지 안보가 소비에트 손에 넘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독일이 레이건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 석유 파동의 경험, 유럽은 이미 다양한 천연가스 루트를 가지고 있었던 점, 독일의 경제적 힘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

에너지 안보는 공급의 다양성에 기초한다. 하지만, 위험한 북한이 아니라도 미국의 셰일가스, 가스공사가 참여하고 있는 개발단계의 모잠비크 전통가스, 기존의 카타르와 호주 등 천연가스 부국들로 공급루트를 다양화하면 될 일이다. 원전보다 더 깊은 공론화가 필요한 심각한 문제이다.

류권홍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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