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확 묘와 대비된 '죽은 능선' 용맥 짧아 홍수 피해도 잦아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생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다산로 747번길 11)에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져 하나가 된 팔당호수가에 마현 마을이 위치한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역임했으며 3명의 부인에게서 5남5녀의 자녀를 낳았다. 첫 부인은 의령남씨로 큰아들 약현을 낳고 24세로 요절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해남윤씨로 약전·약종·약용 삼형제와 이승훈에게 시집간 딸을 낳았다. 그러나 다산이 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부인은 김씨로 약황과 3녀를 낳았다. 다산은 김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다산은 압해정씨(押海丁氏) 23세다. 압해는 지금의 신안군청이 있는 목포 앞바다 섬이다. 시조부터 6세까지 압해도에 거주하다 7세 때 왜구를 피해 황해도 덕수로 이주하였다. 압해가 나주목으로 편입되자 영조 때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다산의 선조들은 11세부터 18세까지 8대가 연이어 문과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어 간 것으로 유명하다. 옥당이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의 별칭이다. 주로 경서·문헌 관리와 왕의 자문에 응하므로 학문이 뛰어나지 않고는 맡을 수 없는 일이다. 이로보아 다산의 학문적 소질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 같다.

다산의 집안이 남양주 마현에 자리 잡은 것은 다산의 5대조인 정시윤이다. 그는 정3품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만년에 마현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다산의 고조, 증조, 조부 3대에 걸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남인에 속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남인들을 등용하면서 아버지가 음사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또한 다산과 형인 약전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다산 집안의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정조가 세상을 뜨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는 남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인들이 많이 믿는 천주교를 빌미로 삼았다. 천주교 대탄압인 신유사옥 때 약 140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처남인 이승훈, 셋째형인 약종과 그의 자녀 철상·하상·정혜, 맏형 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포함되었다. 둘째형인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장장 18년간 있었다. 천주교와 관련은 없지만 다산의 자녀들 역시 불행하였다. 다산은 부인 풍산홍씨와의 사이에 6남3여를 두었는데 대부분 요절하고 2남(학연·학유)1녀만 살아남았다.

다산이 57세의 나이로 귀양살이에서 풀려 이곳 마현 생가에 돌아왔을 때 부모도 형제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맏형 약현만 남아있었다. 다산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18년을 살다가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다산가의 불행은 이곳 풍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인들은 다산처럼 큰 인물이 났기 때문에 이곳이 명당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곳 산세를 꼼꼼히 살펴보면 파란만장한 다산 가문의 불행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를 놓고 산세를 살피면, 예봉산의 주맥은 한확 묘로 이어진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감싸고 있는데, 다산 생가의 맥은 맨 나중 청룡자락이다. 보호룡이다 보니 힘이 없다. 생가 뒤산에 오르면 정약용과 홍씨부인 합장묘가 나온다. 묘 뒤로 난 능선을 보면 큰 변화 없이 일자로 쭉 뻗었다. 사룡이란 뜻이다. 더구나 묘 아래의 하수사는 좌선으로 돌아 계단쪽으로 간다. 그러므로 생가는 맥에서 벗어나 있다. 물론 본래 생가는 현재 자리가 아니고 지금의 주차장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도 뒷산이 한확 묘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맥이 연결되지 않는다.

생가에서 보면 청룡이 앞까지 감싸주지 못했다. 생가의 용맥보다 짧다보니 바람은 물론 한강물이 범람했을 때 이를 막아내지 못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집이 떠내려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더구나 청룡 끝이 화살촉처럼 뾰족하게 생가를 향해 있다. 이를 능침살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상한다고 하는 흉살이다. 산이 뾰족하니 산 따라 흐르는 물 역시 생가를 일직선으로 찌르는 형세다. 역시 사람이 상한다고 하는 수살이다. 백호자락도 생가를 배반하고 한확 묘 쪽으로 돌았다. 그러다 보니 앞이 열려 있어 기운이 다 흩어지는 형상이다. 기가 모여야 하는데 흩어지니 다산처럼 훌륭한 인물도 제대로 역할을 못하였다. 다산이 풍수를 비판하지 않고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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