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 평등, 결정의 공정, 결과의 평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문제되고 있는 점을 총론적·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되었다. 기술개발, 생산증가를 위한 자본의 필요로 국내적으로 독·과점이 허용되고, 외국의 투자자에 초과이윤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를 넘어섰고, 장기간 계속되어 ‘풍요속의 착취’(deprivation amid plenty)는 계속되었고, 乙의 지위에 있는 국민의 절망과 분노는 촛불데모로 대중화되기 이른 것이다. 정치인의 사해동포(四海同胞)적 사회연대적 가치관은 이 사회를 이끌어갈 사상의 정착으로는 자리 잡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남북대결의 냉전의 이데올로기와 지역감정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지위유지의 정치기술로 작동하고 있었다. 노조활동은 제법 개선의 슬로건을 들고 나왔으나 개인적 이기주의의 집단적 표현에 불과했고, 실업자, 비정규직, 중·소상인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노조활동은 가진 자들이 이익을 위한 것일 뿐, 거시적 입장에서 ‘분배의 공정’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타협은 외각 적으로 독·과점의 합리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부 인사들이 상생(相生)과 ‘부의 공평한 분배’를 들고 나왔으나, 치밀하게 설득력을 가진 ‘이론화’되지 못하고, 극소수의 ‘선각자적 진보주의’로 몰리고 말았던 것이다. 즉, 그들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국가철학으로 승화시킬 수 없는 이단으로 몰려 오히려 기득권자들의 공격대상만 되어버렸다. 불평등한 배분(unequal distribution)은 특정 사람·그룹이 사회적 특혜가 되고, 초과이윤을 보장받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지부식간에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혜·초과이윤을 보장받는 자들이 얼마나 사회 윤리적 활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 통계상 나타나야 한다. 미국,영국,일본,독일 등에서 거대한 부를 누리는 기업들이 사회사업을 위한 기부액수는 우리보다 몇 배 많고, 그들은 실업자를 위한 투자를 많이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비천한 자본주의 국가’이다. 국가(정부)는 ‘실질적인 분배정의’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기업들의 개인적 기준에 입각한 저항은 정경유착으로 변형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40년 가까이 문제되고 있는 배분적 정의 왜곡은 기회균등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개인의 창의와 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실적주의를 취하는 자본주의에서 기회균등이 실현되지 않으면, 이는 기존의 결과불평등을 강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한다. 이러한 점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정부(국가)의 강력한 시장개입 정책( governmental intervention)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실적주의를 취할 때 병자, 노인, 장애자, 실업자 기타 임산부, 무주택자 등에 대한 사회보장 제도가 잘 실현되고 있어야 한다. 생존적 의식주에 관한 욕구의 뒷받침이 없는 기회균등·실적주의는 오늘날의 복리국가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연금제도, 보험제도, 최저임금제도, 실직수당, 절대빈곤자에 대한 공적 부조, 무주택자에 대한 지원, 병자에 대한 국가지원 등이 더욱더 강화되어야 한다. 화려한 외관적 정비보다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 내실이 있는 제도가 더 필요하다. 최근 2018년 최저임금을 16% 인상한 것은 ‘배분적 정의’의 최소한의 실현으로 보고 싶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소상인·소기업체 등을 보호하는 시책이 함께 따르고 있으므로, 못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장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송희성 전 수원대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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