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24) 식민지 지배의 새로운 방식, 근대관광

▲ 경성관광안내도. 경성관광협회에서 관광안내 팜플렛으로 만든 「京城觀光の志あり」에 수록된 지도다. 식민지자본주의와 조선관광의 성장을 보여준다. <사진=지도전시관>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등을 구경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관광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 매우 깊숙이 침투하여 현대인의 대표적인 여가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관광이 산업화,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중화와 산업화는 근대관광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근대관광의 기원은 1841년 7월 5일 토마스 쿡(Thomas Cook)이 57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여 영국의 레스터(Leicester)에서 러프보로(Loughborough)까지 실시했던 기차여행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토마스 쿡은 대중의 요구에 응해 몇 차례 여행을 더 실시하였고,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1845년 토마스 쿡 앤 선(Thomas Cook and Son)이라는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는 관광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있었고, 대중을 여행지까지 대량으로 운송할 기차라는 발명품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대중, 즉 관광객의 식사와 잠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식당과 여관, 호텔이 있었거나 이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몇 차례의 국내여행을 성공시킨 토마스 쿡 앤 선사는 당시 유행하던 박람회와 해외 식민지 관광을 통해 더욱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872년 최초의 세계일주 패키지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로써 관광은 전 지구적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였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해외관광은 그 시작부터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박람회가 야만과 문명이라는 시각으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다면 식민지관광은 관광객, 즉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들에게 ‘문명’화 된 시각으로 ‘야만’사회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제국주의적 시선을 보다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광은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 토마스 쿡이 발행한 여행잡지 익스커셔니스트의 표지
▶ 근대 관광의 시작



우리나라에 근대관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라 볼 수 있다. 다만 1897년 9월 23일자의 ‘독립신문’의 논설은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근대관광의 개념이 알려졌다는 사실과 우리나라 내에서도 관광을 산업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무렵 대한제국에는 관광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는 계층, 즉 중산층이 매우 미약하였고, 아직 다중을 운송할 수 있는 교통수단(철도)이 없었기 때문에 근대관광이 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고 이어 1905년 경부철도, 1906년 경의철도가 개통되면서 근대관광은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한반도의 곳곳에 부설된 사설철도는 근대관광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와 같이 철도 이용객을 증가시켜야 하는 사설철도회사에서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한 관광지 개발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필자가 ‘발전’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의 근대관광이 내재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이식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조선총독부철도국이나 각 사설회사, 혹은 경성관광협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관광협회에서는 조선여행 안내서나 관광팜플렛 등을 다수 발간하여 조선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 유럽에까지 조선관광을 홍보하였다.



▲ 1935년 중앙 고등 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압록강을 건너 펑텐까지 다녀왔다. 수학여행은 3·1 운동 이후부터 보편화돼 만주나 일본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사진=우리역사넷>
▶ 철도와 역을 중심으로 한 침략적 성격의 관광



1906년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만한순유단’이 조선과 만주를 방문하였다.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승지 관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이들은 평양을 방문해서도 고구려의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위대한 전적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는 토마스 쿡의 해외여행이 식민지 관광에서 비롯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관광은 ‘보는 자’, 즉 제국주의의 국민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자’, 즉 피식민지의 국민 혹은 민족을 관찰하는 침략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철도 연선의 각 역을 중심으로 개발된 식민지시기 관광지의 특징은 우리나라의 역사 유적지, 근대시설이 설치된 곳,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기도의 경우 근대시설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수원은 권업모범장, 고등농림학교, 잠업강습소와 서호 등 근대 농업과 관련이 있다. 인천은 축항, 세관, 관공서, 미두취인소, 공원, 관측소, 무선전신소, 부업공진회, 검역소와 인천부가 계획적으로 개발한 관광지 월미도가 유명하였다. 개성은 만월대, 선죽교, 채운동, 자하동, 인삼상황, 박연폭포, 왕릉, 두문동, 홍삼제조소, 호수돈여고보, 고려여자관, 절사정, 공립상업학교, 숭양서원 등이 유명하였다. 이러한 관광지를 소개하는 일제시기의 관광팜플렛의 문화유적 해설 가운데는 해당 유적을 일본과 관련된 사항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간한 관광팜플렛에는 수원의 권업모범장을 “고갈된 반도 농산계의 개량지도를 위해 총독부가 시설한 것”이라 한 후 잠업강습소 역시 권업모범장 내에 위치하였으며, 서호는 양어장이었다고 소개하였다.



▲ 일제강점기에 조선식 건축의 대표로 자리잡은 수원역 모습. 기차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상권이 형성돼 관광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사진=수원박물관>
▶ 가장 활발했던 경기지역 관광



한편 3·1운동 이후에는 벚꽃놀이, 즉 관앵대회(觀櫻大會)가 매일신보사 등 언론기관을 비롯한 관변단체들의 주도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0년대의 벚꼴놀이가 개인들의 일상적 활동으로 행해졌다면 3·1운동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대중적, 산업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벚꽃놀이의 명소로는 서울의 우이동, 노량진의 봉산유원, 창경원, 경기도의 수원, 개성, 월미도 등이었으나 이후 청주, 마산, 동래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31년에는 강화도에서도 관앵대회가 있었다는 ‘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었다.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수원관앵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이후 1923년까지 매일신보사는 수원관앵대회를 계속 개최하였다. 1920년 매일신보의 보도를 보면 매일신보사가 이 대회를 얼마나 성대하게 개최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매일신보사는 1920년 4월 25일을 수원관앵대회날로 정한 후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협의하여 임시열차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기차는 곱게 장식을 하였고, 서울 출발 시와 수원 도착 시에 각각 불꽃놀이를 통해 관앵대회단원을 환영하도록 하였다. 관광코스는 수원 도착 후 권업모범장으로 이동하여 벚꽃을 구경한 후 서호로 이동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도록 하였다. 특히 서호에서는 관앵단원을 대상으로 낚시를 허용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군청 앞,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으로 이동하여 꽃구경을 하도록 하였다. 점심 식사 후에는 불꽃놀이를 신호로 권업채권 30장을 경품으로 한 보물찾기를 여흥으로 집어넣었다. 보물찾기는 불꽃놀이를 신호로 끝내고 수원역으로 이동하여 귀경하는 것이었다. 이 관앵대회의 회원권은 매일신보 본사, 태평정 성문당, 본정 정전(町田)신문부 등에서 발매하였다. 1921년 수원관앵대회의 참가비는 대인 1원 20전, 소인(4세 이상~12세 미만) 60전이었다. 특히 관앵대회의 환송과 도착 풍경은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1906년 아사히신문사가 기선 로셋타 마루를 빌려 개최하였던 만한순유단에 대한 환송과 도착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이외에도 개성은 복숭아꽃이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보 철도국에서는 1912년 임시열차를 편성하였다. 이 여행은 인기가 있어 이듬해인 1913년에는 희구옥이라는 여관에서 관도회를 주최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개성은 고려의 왕도였으므로 유명한 사적지가 많았으므로 일찍부터 학교의 수학여행지로서도 각광을 받았다.

한편 수학여행도 관광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이전에 행해진 수학여행지는 국내에서는 경성, 개성, 수원, 인천, 강화, 남한산성, 평양 등이며, 일본과 만주 등지로도 해외 수학여행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경기도 일대가 관광과 수학여행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920년대에는 수학여행지는 경주, 부여, 평양 등지로 더욱 다양해졌으나 경성, 개성, 수원, 인천, 강화도 등 경기도의 수학여행지의 인기도 여전하였으며, 수학여행의 관람 장소도 일반 관광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관광가이드북, 리플렛, 팜플렛 등 다양한 관광 안내서와 다양한 종료의 사진엽서가 간행되어 관광과 여행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하였다.



▶ 근대 관광의 한계점



그런데 관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우리 민족이 관광을 제대로 향유했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1920년대 초반 크게 활성화했던 일본시찰단의 경우 조선총독부가 어떠한 형태로든 여행경비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국내관광은 이와 달랐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국민이 농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관광은 유한계층의 전유물이었다고 판단된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이미 관광을 식민지 지배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광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 문명화하였다는 점을 선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상당수의 관광지가 근대시설이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대표적인 여가생활의 하나인 관광은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크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성운 경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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