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집과 공공건물 입구에 잔디를 심는다는 생각은 중세 말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의 저택에서 탄생했다. 그중 최초는 16세기 초 프랑수아 1세가 지은 루아르 계곡에 있는 샹보르 성의 잔디밭이었다. 이후 잔디밭을 가꾸는 습관은 근대 초기에 깊이 뿌리 내려 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잘 관리된 잔디밭을 갖기 위해서는 땅은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잔디 깎는 기계와 자동 스프링쿨러가 없던 시절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농부들은 잔디 따위에 귀중한 땅과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대저택 입구에 깔린 정갈한 잔디는 따라서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지위의 상징이었다. 잔디는 지나가는 모든 행인에게 당당히 공표했다. "나는 부자이고 힘이 있다. 그리고 이 푸르른 사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땅과 농노를 소유하고 있다." 잔디밭이 넓고 잘 정돈되어 있을수록 힘 있는 가문이었다. 어느 공작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집 잔디밭이 형편없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귀한 잔디밭은 중요한 축하연과 사회적 이벤트들이 열리는 무대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엄격한 제한구역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궁전, 정부청사, 공공장소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단호히 명령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동시에 잔디는 스포츠 세계를 평정했다. 지난 200년 동안, 축구와 테니스의 진짜 중요한 경기들은 잔디밭에서 열렸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빈민가 아이들은 모래와 흙 위에서 공을 차지만 잘사는 동네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 공들여 관리한 잔디밭에서 축구를 즐긴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잔디를 정치권력,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미국 교외의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은 부자의 사치에서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길을 걸어갈 때 잔디밭의 넓이와 잔디의 질만으로 그 집의 부와 지위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이웃집에 뭔가 우환이 있다는 표시로 앞마당에 방치된 잔디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잔디는 요즘 미국에서 옥수수와 밀 다음으로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고, 잔디산업(잔디, 퇴비, 잔디 깎는 기계, 스프링쿨러, 정원사)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도 잔디 얘기가 나온다. 프랑스 공원의 잔디밭 푯말에서 똘레랑스(관용)의 사례를 뽑아낸 것이다. 프랑스의 공원푯말에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위압적인 명령문 대신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라고 쓰여 있는데 그게 바로 똘레랑스의 표상이라는 설명이다. 푯말에서 말하는 존중은 응당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이겠으나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 나오는 잔디의 역사를 읽다 보면 그것은 어쩌면 귀족의 부와 권위를 존중하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2월에 시작했던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의 ‘독서와 글쓰기’ 강의가 지난주에 종강을 맞았다. 한 학기를 훌쩍 넘는 6개월의 대장정이었다. 강좌 기간 내내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었고,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저, 김영사 간)였다. 방대한 분량의 인류역사를 함께 읽으며 우리는 다양한 층위의 논의를 진행했다.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에 대해서, 화폐와 제국주의, 행복에 대해서. 논의의 방향은 결국 현실의 문제로 이어졌다. 바로 그 대목에서 잔디의 역사와 똘레랑스의 역사를 소환했다.

“더 이상 군림하는 행정, 시민에게 명령하는 행정은 곤란합니다. 관용의 정신이 담긴 ‘인문행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잔디는 애초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그것을 똘레랑스의 표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문행정의 빛나는 예라 할 것입니다.”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학생들은 수원시의 중견 공무원들이다. 1년 동안 공부하면서 그간의 공직 경험을 되돌아 보며, 앞으로의 공직생활을 보다 알차게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 강의에서 함께 읽은 책, 함께 나누었던 논의들이 현장에서 끝없이 모색되고 실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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