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때문에 염소 뿔도 녹는다는 대서(大暑)도 지나고 이제 일주일 남짓이면 입추인데, 아직 피서나 여행을 계획한 일이 없어 여느 계곡 물가에도 가보지 못하고 가을을 맞게 생겼다. 그런데도 아쉬움 하나 느껴지지 않으니, 이는 다른 무언가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주세페 폰티지아 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목적 없는 독서’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 시대의 또 한 분의 간서치(看書癡)인 김무곤 선생이 권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 아닌가도 싶다. ‘쓸모없는 책 읽기’를 많이 한 사람들은 ‘목적 있는 책 읽기’만 주로 한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고 따뜻해진다는 견해인즉, 나 역시 주제넘게 그들의 틈에 끼어 더위를 벗 삼아 당장에 ‘쓸모없는 책 읽기’로 여름 나기를 하고 있다. 그야말로 그냥 목적 없는 독서에 여차하면 뜬 눈으로 새벽을 맞기 일쑤지만, 내게 있어선 그 어느 시원한 계곡에서의 발 담그기가 부럽지 않은 더없이 좋은 피서이자 쾌락의 시간이다.



7월은 ‘시오노 나나미’가 쓴 <십자군 이야기>로 시작했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이 격돌한 이야기이다. 그보다 먼저 읽었던 <로마인 이야기>에서 어떤 비평가가 “큰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생각과 상상력이 과도하게 많이 담겨있다”라고 지적한 것이 생각나 이 <십자군 이야기> 역시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역사이야기로 읽었더니 오히려 3권 전권에서 작품의 사실적 접근을 위해 치밀하게 노력한 흔적이 느껴져 더욱 흥미로웠다. 종교가 일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 당시 그리스도교회의 영향력을 키우는데 골몰하고 있던 로마교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는 명(?) 연설로 예루살렘 성지 해방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켰다. 그로 인해 20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들이 충돌하며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 원정은 인간성의 해방을 불러온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서곡이 되어 돌아온다. 신(神) 중심에서 인간 중심 시대로, 이 또한 신께서 원하셨던 것이었을까?



다음으로 마주한 책이 조선희의 신작 장편 소설 <세 여자>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소설은 암울했던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 땅의 정치적 격변기를 역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대를 앞서간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라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결국 오지 않았으나, 잊혀있던 세 여자와 주변의 삶들이 작가의 집요한 추적과 열정으로 기어이 역사의 한 장이 되어 나왔다. 소설이라 하지만 앞서 읽은 ‘십자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한 역사적 고증으로 그 시절, 한반도의 정치적 사상과 상황을 다룬 필독 역사서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다.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남과 북의 체제 경쟁으로 인하여 비록 일제 식민시대라 할지라도 공산주의 활동을 한 인물들은 쉽게 매도, 매장되어 있었고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세 여자>는 ‘당시의 주의, 주장은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 사상이자 시대의 흐름이었지, 소위 적화나 체제 전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기에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재단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세 여자, 그리고 그들의 남편이자 동지였던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을 비롯하여 실제 했던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당시 독립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혁명가요 애국자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수록 왜 이리 마음이 버겁고 부끄러워지는지? 작가는 이 작품을, 12년이란 긴 인고와 숙성의 시간을 거쳐 뽀얀 사골 국물처럼 담백하게 우려내 놨는데, 나는 더위에 시원한 냉국수 말아먹듯 후루룩 들이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책 읽기’를 하다 때로 이런 대어를 만나기라도 하면, 다음 읽을 책을 쉬 고르지 못하고 한 템포 쉬어 갈 수밖에 없다. 작품이 주는 무게감과 긴 여운으로 인한 가슴앓이 때문이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 객좌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