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25)좌우대립 속에서의 경기도

▲ 38선 부근에 미군이 세운 푯말.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15일 정오, 일왕의 항복 발표 이후, 일본의 패망과 해방의 소식은 곧바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거리에는 해방의 환희가 넘쳐났다. 그러나 해방이 곧 바로 희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방과 분단, 미소의 대결, 좌우의 대립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이 이어졌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안개정국 속에서 경기도 사람들은 고단한 살림살이를 일구고 새롭게 삶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 미소점령지 사이의 38선 모습.
▶ 38선 분할과 미군정의 실시

한반도의 해방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이었던 만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 등 승전국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선의 분할점령에 합의하였고, 이 잠정적 분할선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점차 분단선으로 고착화되었다.

해방 직후 정국은 독립국가를 향한 한국인들의 열망과 미소 두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하면서 긴박하게 흘러갔다. 한국인들은 해방과 동시에 건국활동에 들어갔다. 경기도 양평 출신의 걸출한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은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하고 건국사업을 전개하였다. 8월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건준 지부가 생겨났다. 건준은 좌우파의 협력에 기반해 새로운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건국운동을 주도했으나, 그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였다. 다분히 미군의 진주를 의식한 조치였다. 우익진영은 미국의 진주를 앞두고 건준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진주에 따라 남한의 정세를 요동치기 시작했다.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 24군단은 다음날 서울에 입성해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접수하였다. 미군은 9월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을 설치하고, 38도선 이남의 주권은 미군사령부와 미군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정부 수립 운동에 대한 명백한 거부였고, 이는 즉각적인 독립된 정부 수립과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과의 첨예한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좌우 대립과 갈등의 격화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는 한반도를 거대한 정치투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삼상회의의 골자는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통한 조선임시정부의 수립,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였다. 삼상회의 결정사항에서 신탁통치는 미소공위와 조선임시정부의 협의를 통해 결정될 사안이었지만, 신탁통치 문제가 국내에 먼저 알려지면서 정국은 일순 ‘반탁’열기로 뒤덮혔다. 우익은 ‘반탁’을, 좌익은 ‘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선언한 가운데, 1946년 2월 우익과 좌익은 각각 ‘비상국민회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결집하여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중앙정치의 좌우 분열은 지역에서의 극심한 좌우 대립을 불러왔다.

경기도내의 정치세력은 해방 초기에는 좌익세가 압도적이었으나, 미군정 이후 우익세력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인공 수립 이후 좌익은 인민위원회로 집결하였고,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계기로 민전 경기도위원회로 결집하였다. 우익세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우익 청년단체였다. 우익청년단체들은 돌격대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에서 좌익을 제압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경기도에서 좌우의 대립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대립에서 시작하여, 1946년 ‘9월 총파업’과 이른바 ‘10월 폭동’을 거치면서 유혈충돌을 불러올 정도로 격화되었다. 좌익들의 대규모 저항은 1948년 5.10선거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나, 미군정의 탄압으로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해방 공간에서의 정치적 대립의 기저에는 해방 후의 경제적 피폐와 생활난에 대한 대중의 불만,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열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38선의 단절로 남북경제는 일시에 단절되었고, 귀환동포와 북한으로부터의 월남민의 대거 유입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불러왔다. 경기침체와 급격한 인구증가는 식량부족, 실업, 주택부족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농민들의 저항에는 토지개혁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1945년말 남한 소작농가 호수는 전체 농가의 48.6%를 차지하고 있던데 반해, 경기도는 전체의 64.3%에 달하여 남한 전체 평균을 상회하였다. 미군정은 일본인 몰수토지를 신한공사를 통해 1948년 불하하여 농지개혁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농민들의 열망인 농지개혁은 실현될 수 있었다.



▶ 도정의 회복과 새로운 희망들

정치 혼란과 경제 침체 속에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은 계속되었지만, 도정의 회복으로 미약하지만 희망의 싹도 자라나고 있었다. 미군정 수립 이후 미군은 1945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경기도의 행정권 접수에 나섰고, 10월 2일 마이어스(William B. Myers) 육군소령이 경기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947년 2월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구자옥이 경기도지사로 임명될 때까지 미군이 도지사를 수행하였다.

38선 분할, 서울시 분리 등으로 인해 행정구역도 개편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38선 이북 지역을 경기도에서 탈락하는 한편, 38선 이남의 황해도 지역을 경기도에 편입했다. 1946년에는 서울시가 특별시도 승격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다.

생활난의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한 경기도 사람들의 노력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배움에 대한 욕구는 강렬했다. 미군정 하에서 식민지 교육의 청산, 학제 개편 등 각종 교육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결과 학교와 학생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에컨대, 해방 당시 경기도 초등학교 수는 395개교, 학생수 270,108명이었으나, 1950년에는 각각 407개교, 403,074명으로 크게 늘었다. 해방 당시의 통계는 서울을 포함한 수치이므로, 실제 증가률은 훨씬 높다고 할 수 있다. 문맹퇴치운동도 커다란 성과를 보였다. 1947년 현재 경기도의 총인구는 240만 4천여명이었는데, 1947년말 5월말 현재 13세 인구 141만 2천여명 중 미해득자는 겨우 26만 여명에 불과하였다. 문맹률은 해방 후 68%에서 1947년 22.5%로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새로운 문화 수립을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도 이어졌다. 도내의 인천, 개성, 강화도서관 등 공립도서관이 새롭게 정비되었고, 1946년에 개성박물관이 재개관하고, 인천시립박물관과 인천시립예술관이 개관하였다. 같은 해에 경기도체육회가 출범하여 활발한 체육활동을 전개하였다.



▲ 개성지역의 월남민 수용소.
▶ 정부 수립과 불안한 평화

1946-1947년 1, 2차 미소공위는 아무런 성과없이 막을 내렸다. 미군정과 좌익의 대결, 좌우정치세력의 대립 속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여운형은 7월 19일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노선은 힘을 잃었고, 미소대립과 좌우갈등 속에서 통일정부의 꿈은 점점 멀어져갔다.

미소공위 실패 이후 미국과 소련은 독자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안’을 가결하였다. 소련과 북한의 거부로, 유엔은 결국 선거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최종결정했다. 그것은 사실상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구과 김규식, 중간파 세력은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의 길을 모색했으나, 단독선거의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1948년 5월 10일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경기도에서는 160명이 입후보하여 29명이 당선되었다. 후에 대통령 후보로 활동한 신익희와 조봉암도 경기도에서 선출되었다. 신익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광주에서, 조봉암은 인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제헌의회의 헌법제정과 대통령 선출을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곧이어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38선을 마주하고 남과 북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1949년 미소 양군이 철군한 이후, 38선 부근에서는 남북의 충돌이 격화하였다. 1949년 말을 기해 남북 교전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불안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월 25일, 이 불안한 평화는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이동헌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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