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수립 후 2017년 오늘날까지 약 70년 가까이 우리는 여·야 대치, 또는 군사정치속에서 생활해 왔다. 그러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격언을 놓고 볼 때, 우리 국민은 '새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몇 번의 민주항쟁은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의 수준을 지금의 정도까지 이끌어 온 공로는 부인치 못한다. 그러나 ‘헌법’을 기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치고는 많은 정변을 겪었고, 유난히 여·야의 정치적 대결, 군부정권에 시달리는 삶의 상태에 있어 왔다. 그리고 남·북의 전쟁과 그 위험상태의 계속에서 오늘날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가 말했던가.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했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상명하복적 정치문화가 형성되어 있거나 여·야의 첨예(尖銳)한 대립에다 지역감정까지 가세한 것으로 중세봉건정치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를 선진국 민주주의 수준으로 접근시키기 위한 국민의 몇 번의 저항과 집단적 희생도 4회를 넘는다. 드디어 놀랍게도 대통령직위에 있는 자를 합법적으로 그 자리에서 물러가게 하고,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민주주의·법치주의의 발전사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 발전,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관행적 폐습이 뚜렷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계에 몸담아 있는 인사들의 ‘정치적 언행’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치인들의 ‘형평적 사고’를 갖고 또 서로 존중하는 언행을 할 때 가능해 질수 있다. 정권을 잡은 자 및 여당은 야당의 이견 내지 반대를 당리·당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압하여야 하는 ‘적의 태도’로 간주하는 전쟁논리로 임하여서는 안 될 것이고, 야당은 대안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은 백년하청 격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나 여당은 서로 상생(相生)하는 입장에서 역지사지 하는 생각으로 야당을 이해시키고 설득하여야 한다. 나는 이 점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우려는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집권당 측에서 아량을 가지고 사과하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정치공학의 기술’로만 보지 않고, ‘선량한 이성적 인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매우 흐뭇한 마음이다. 물론 그동안 반대자에 대한 막말(?)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논평으로 새길 여지가 있기도 하였으나 반대의 입장을 무시한 ‘수준이하의 발언’의 면이 더 강하였다. 국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지도자의 언행이 편 가르기를 강화하고, 심지어 지역감정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노린 것이라면 논리의 비약일까. 나는 일찍이 보지 못한 한 정치인의 발언에 대한 집권세력측의 사과를 보면서 정치가 하루아침에 ‘영국식 신사정치’로 한 단계 높아지는 감명을 받았다면 한 개인의 지나친 감정일까. 거두절미하고, 정치에 몸담아 있는 정치인들이 구태의연한 대립,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 노이즈마케팅 유사 언행에서 벗어나, 점잖고 형평적인 발언을 한다면 일등 민주주의 국가로의 진입이 멀지 않았다고 본다. 매우 다행인 것은 세 분이 모두 대통령을 지낸 후 작고한 후로는 지역감정에 의한 정치는 많이 사라진 것 같으므로 민주정치의 발전은 정치지도자들의 모범적 언행에 달려있다고 본다. 차제에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은 보수다 진보다 하는 표 얻기 위한 슬로건을 내세우는 가치는 집어치우기 바란다. 자유 민주주의 체계를 엎으려는 진보도 안 되고, ‘사해동포’(四海同胞)·연대의식을 저버린 보수도 반 복리 국가적이다. 보수나 진보나 모두 적폐청산에는 동참하여야 한다. 지금 보수가 진정한 의미를 벗어나 기득권보호, 재벌보호, 개혁을 도외시하는 ‘법적안정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결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송희성 전 수원대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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