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시의적절한 법률과 정치적 조치로 경제, 군사적 역량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19세기 전세계를 식민지화 했던 나라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다. 당시 독일 지역은 영국과 달리 제후국으로 흩어져 모든 면에서 후진적이었다. 그러던 독일의 상황은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크게 바뀌게 된다. 동질 의식이 고양되면서 군소 국가들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결집한 것이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훔볼트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강력한 교육개혁을 주도했다. 중세 대학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독일 대학은 질적으로 다시 태어났고 1809-10년 설립된 베를린 대학은 당시 독일 대학 개혁의 리더였다. 이때부터 대학의 의무는 구태의연한 지식의 주입, 전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고 헌신하는 것이며 교수는 곧 교육자이면서 연구자라는 새로운 근대적 사고 방식이 나타났다.

19세기 독일 대학의 개혁은 독일을 근현대 과학기술의 최강국의 위치로 견인했던 핵심 동력이었다. 지방분권 사회에서 학문과 이동의 자유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수준 높은 과학자 사회가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었고 성공적인 과학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줌으로써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그 결과 젊은 연구자들은 건강한 경쟁의 마당에서 독일의 과학 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예컨대, 막스 폰 라우에는 뮌헨 대학 사강사(provatdozent) 시절에 결정격자 내에서의 X-선 회절현상을 발견해 스승 막스 플랑크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았다.

독일 과학의 성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정부가 지원한 연구소들이다. 1887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 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가 설립되었다. 영국에 캐번디시 연구소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PTR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 제국의 수도인 베를린 근교에 위치했던 이 연구기관은 베를린 대학 교수가 소장을 맡아 운영하고 근처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과 연계하여 강력한 정부 지원 하에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 정부의 선택은 옳았다. PTR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라는 연구소 네트워크로 진화했고, 후발 국가였던 독일을 선진국의 반열에 들게 만들었으며, 세계대전 후 막스플랑크 과학진흥협회로 재탄생했다.

이 과정의 막후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무려 25년 간 프로이센의 교육, 과학, 문화 정책을 책임졌던 알트호프라는 고위관료가 있었다. 그는 후일 ‘과학의 중재자’(moderator scientiarum)라고 불리웠는데,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이 일상적인 잡무로부터 해방되어 전적으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연구소가 자신의 조국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신인문주의 이념과 새로운 산업사회의 수요, 당시 독일제국의 요구 등을 결합시킬 줄 아는 정치적인 재능이 있었다. 프로이센 재무부 장관은 아인슈타인이 이끄는 연구소에서 행하는 연구 활동이 어떻게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국가를 도울 수 있는 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프로이센 지식인들은 정부의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관리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연구기관 운영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젊은 무명의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에 임명된 것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구축된 연구기관이라는 자산은 분단 이후 통일 독일의 화학적 통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동독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운 막스플랑크-프라운호퍼 연구소는 기초와 실용 연구 양대 축으로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동시에 과학기술의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다음 세대의 교육, 문화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미래를 위한 내적 역량도 착실히 축적해나가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하여 온통 시끄럽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알토란 같은 미래 자원들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헌데,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인 것 같다. 민간은 몰라도 공공부문에 있어서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과학기술 비전이 있다면 그럴 리 없을 텐데... 하긴 무리는 아니다. 우리에겐 지방분권의 역사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고민의 역사도 너무 짧으니 말이다. 역사의 맥락은 변주된다. 선진국의 현재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들이 오랜 기간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 저변을 살필 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택동 서울대 교수, 융기원 부원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