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부터 6월 항쟁까지 (27)경기도의 민주화 운동

▲ 이한열 군의 장례식 행렬. 그의 장례식은 민주 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고, 훗날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흔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중혁명을 통해 오늘의 한국사회를 설명하기도 할 정도로 민주화 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장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그리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미 일제시대에도 제법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실감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부터였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은 바로 1950년대에 민주주의가 매우 중요한 가치로 사람들에게 펴져갔음을 반증해준다. 다시 말해 4?19 혁명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대의로 내걸고 일어나 권력 교체까지 이루어낸 최초의 대규모 군중행동이었다. 요컨대 민주주의의 가치는 대통령까지 바꿔버릴 정도로 중요해진 것이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를 내걸고 도시 중심으로 학생들이 주도하여 권력 교체까지 이루어낸 최초의 사건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미국의 역할이 중요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4.19 혁명 당시 경기고 학생들의 시위 = 민주화기념사업회
▶ 경기도 민주화 운동의 시작

경기도의 민주화 운동 역시 4?19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1960년 3월 10일 수원농림고등학교가 경기도 최초로 4월혁명에 참여했고 3월 13일에는 오산고 학생 100여 명이 장날을 이용해 학원 자유를 외치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후 서울 농대가 4월 20일에 참가하였다. 여타 지역에서처럼 수원에서도 중고등학교 학생이 먼저 시위를 전개하고 뒤이어 대학생이 나서는 형국이었다.

장면 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23일 시위는 절정에 달해 수원시내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서울 농대생 800여 명은 서울 중앙청까지 행군했는데, 이는 서울 장정 시위의 첫 케이스였다. 4월 26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7-800여명이 경찰서와 자유당 수원시당부를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으며 시민들은 연도에서 이를 성원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시위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서울농대생들은 치안유지, 질서회복을 호소하는 선무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수원지역 대학생들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중고등학교 학생들보다 뒤늦게 참여하기도 했고 또 시위 이후 질서유지 역할에 나선 것, 선무 및 계몽활동으로 이어진 것 등이 특정적이다.

이런 사례에서 보이듯이 4?19 당시 대학생들은 선도적이지는 않았고 뒤늦게 참여하여 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19 혁명을 대학생들이 주도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후일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윤색된 것이었다. 특히 대학생들은 시위 이후 선무와 질서유지 활동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이와 달리 수원 농고는 이미 일제시기부터 여러 차례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고 1928년에는 3학년생 10여 명이 朝鮮開拓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투쟁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와 전통이 4?19 당시의 선도적 역할과 밀접히 관련된다고 보인다.



▲ 87년 현대계열 7개 노조 연합 시위. 서울의 급팽창과 수도권 비대화로 민주노조의 설립과 쟁의 역시 성장했다. = 민주화기념사업회
▶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 민주화 운동의 2막

4?19혁명 이후 5?16 군사쿠데타가 이어지면서 경기도의 민주화 운동은 오랜 기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다시 전개된 것은 유신체제 성립과 함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의 할복 자살 사건이었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생 300여 명이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 연사로 나선 4학년생 김상진이 ?양심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낭독한 후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김상진은 끝내 다음날인 12일 숨졌고 5월 22일에는 일명 ‘오둘둘’로 불리는 김상진 열사 장례식과 추도식이 열려 4천 여명의 학생이 참석해 유신체제하 대표적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1970년대 경기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광주 대단지 사건이 그것이다. 서울의 과밀화와 함께 도시 빈민들의 집단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정권 입장에서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권 안보 차원에서도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권력 핵심부가 위치한 서울 도심에 수십 만의 도시빈민이 집결해 있는 것은 4·19와 같은 대규모 군중시위 발생시 시위 확산과 격화의 주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사건 당시 국회 입법조사관의 발언을 보면 “못사는 다수의 민중을 한곳에 집결시켜 놓으면 반란 세력을 구축하기 용이하고 폭동의 흥기가 쉽다”고 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서울 도시빈민 분산 대책을 강구하게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광주대단지였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광주 대단지는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고 또 개발 비용 회수가 시급했던 서울시가 개발용지 처분을 서두르면서 이주민들의 전매 금지, 일시불 상환조치 등을 추진했다.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지 가격을 평당 2000원으로 할 것, 10년 분할 상환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진행했다. 약속했던 서울시장이 제때 나타나지 않자 분노한 주민들은 관공서와 경찰 등을 공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해 궐기대회가 폭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서울시와 정부가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시위는 진정되었지만, 사태 이후 박정희는 이 사건을 도시 폭동으로 간주하고 “주동자를 엄단에 처하라”는 메모를 남겼다.



▶ 신군부의 출현과 80년대 민주화 운동



경기도의 민주화 운동이 크게 성장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그 주요한 배경은 서울의 급팽창에 따른 수도권 비대화였다. 1970년대부터 서울 인근에 이른바 위성도시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부천, 안양, 성남시와 같은 노동자 밀집 지역이 형성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상당수 대학이 1980년대부터 경기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신설되면서 대학생 운동의 저변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광주가 던진 충격은 그 어떠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고 수많은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책은 물론 사진과 비디오 자료를 통해 광주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공포와 전율을 넘어 분노와 저항의 외침이 대규모적으로 확산되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광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군부의 탄압으로 숨죽였던 민주화 운동은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와 유화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부활되었다. 1985년 4월 11일에는 400여 명의 서울농대 학생들이 교내 강당 앞에서 김상진 열사 10주기 추모제를 가진 뒤 교문밖 진출을 시도하며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11월 12일에는 서울농대, 성균관대, 한신대 학생 25명이 수원시 고등동에 위치한 노동부 지방사무소에 기습침입하여 농성투쟁을 벌였다.

한편 노동운동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거쳐 현장 투신이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졌고 각지에서 민주노조 설립과 노동쟁의가 빈발했다. 짧은 지면에 일일이 소개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운동의 저변이 넓어졌으며 1986년 5?3 인천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성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 이 와중에 1986년 11월에는 유명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 6월 민주항쟁
▶ 민주화 운동의 꽃이자 근간, 6월 항쟁



이렇게 성장한 민주화 운동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1987년 6월항쟁이었다. 해방 이후 최대의 군중시위가 전개된 6월항쟁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전개되었으며 경기도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6월 10일 수원에서는 대회 예정지인 팔달산 공원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가두 시위가 전개되어 117명이 연행되고 330여명은 철야농성을 전개하였다. 성남에서는 시민과 학생 400여 명이 시청앞과 종합시장 앞 등에서 시위를 전개하여 36명이 연행되었다.

국민평화대행진이 있었던 6월 26일에는 안양에서 수원안양지역 대학생과 노동자 등 4천여 명이 저녁 8시부터 안양시내에서 시위를 전개해 다음날 새벽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밤 11시 경에는 안양경찰서를 포위하고 돌과 화염병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안양시청, 민정당 지구당, 파출소 등이 공격당했다. 수원에서는 대회장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전개해 새벽 1시에는 4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6월항쟁의 승리와 함께 민주화 운동 역시 눈부시게 확산되었다. 곧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어 수많은 민주노조가 생겨났고 학생운동은 전국적 조직을 갖추었으며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수대협)도 만들어졌다. 요컨대 6월항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87년 체제’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알고 있는 개념이지만 사실 그 의미를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컨대 박정희와 전두환도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사용한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그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동일하게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해도 그 의미는 제각각일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숱한 민중들의 염원과 희망이 녹아들이 있는 것이자 지배자들의 위선과 기만, 정치인들의 야욕이 숨어있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외치는 민주주의에는 어떤 의미와 뜻이 담겨야 하는지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민주화 운동이 될 것이다.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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