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의 본래 이름은 ‘바위’였다. 지금의 남양주의 옛 이름인 풍양현(豊壤縣)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천마산 바위굴에 들어가 수양을 하며 도를 닦았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바위도인’으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왕건이 찾아왔다. 당시 왕건은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는 중이었다. 휘하 장군 하나가 풍양현에 바위도인 숨어 사는데 그의 지략을 빌려보자는 의견을 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은 것이다. 바위도인은 그 길로 왕건을 따라 나섰는데 나이가 70세였다. 그는 온갖 지략으로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왕건은 그를 개국공신으로 봉하고 문하시중 평장사 벼슬과 함께 제일 손위라는 뜻으로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묘를 감싸고 있는 현무·주작·청룡·백호는 서로 빈틈없이 서 있다. 앞산 너머로는 불암산과 북한산까지 이곳을 향해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경호원들이 이중삼중으로 VIP를 경호하는 거와 같은 형상이다. 산들이 주밀하게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면 기가 오랫동안 보전된다. 그만큼 발복이 오래간다는 뜻이다. 전후좌우 봉우리들은 그 모양이 붓끝처럼 생긴 문필봉, 노적가리처럼 생긴 노적봉, 말등처럼처럼 생긴 천마사 등이 즐비하다. 특히 묘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은 여의주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이 때문에 이곳의 혈명을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간다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또는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논다는 비룡농주형(飛龍弄珠形)으로 보기도 한다.
묘가 있는 능선 아래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작은 샘물이 있다. 풍수에서는 이를 진응수라고 한다. 용맥 양변에서 용의 생기를 보호하며 따라왔던 원진수가 묘 뒤에서 갈라졌다가 다시 앞에서 합수하여 생긴 것이다. 진응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용의 기가 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혈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관리를 하지 않아 방치된 것이 아쉽다. 주변 골짜기 물들은 마을 앞에서 합수하여 좁은 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깊은 산속이지만 물이 풍부하다, 풍수에서 산은 인물,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본다. 산세와 수세가 좋으니 귀와 재물이 마르지 않는 터라 할 수 있다.
이 묘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선조 후궁인 공빈김씨가 죽자 뒤로 불과 30보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 당시 법으로 왕실의 묘가 들어서면 그 일대 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조맹 묘도 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선조가 말렸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자 자신의 생모인 공빈김씨 묘를 성릉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따라 묘지 이장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장은 하지 않되 봉분을 없애고 그 위에 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그리고 15년 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고 성릉은 성묘로 환원되었다. 조맹 묘는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죽어서도 어머니를 보고 싶다며 묘소 맞은편 능선에 묻혔다.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