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의하면 ‘형평’이란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수평이라고도 한다. 물리적으로 볼 때, 사람의 몸의 각 부분이 형평을 이루지 못하면 똑바로 서거나 기와침식(起臥寢食)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신체적 불형평(불균형)은 하나의 질병으로 의사가 그 원인을 찾아 치유하게 됨은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형평(불균형)’의 치유방법은 정치인·대기업가, 기타 사회지도층의 역할에 달려있다. 그런데 그들이 치유처방을 내놓지 않거나 그 치유방법이 잘못되어 있으면, 사회적 불형평은 심화될 뿐 치유는 기대하기 어렵고, 전반적인 사회부정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흔히 범법사실에 대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보복으로 비춰지고, 국민간의 갈등을 더 조장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법적안정성’이라는 면에서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잘못된 일들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국민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종교의 자비심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자고 하는 주장의 타당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범법사실들을 관용적으로 덮는 것이 그런 범법사실의 재발을 초래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할 때 반 법적행위는 계속 반복될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과거사에 대하여 잘못된 ‘형평관’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 대통령 중에는 그들이 ‘고난의 역사’의 주인공이면서도 보복으로 비춰지는 것을 꺼려 진상규명을 외면하거나 진상규명에 한계를 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라디컬하게 드러나 사실들만 단죄하고 숨어서 움직여온 범법사실, 반형평적 사태를 외면해 온 가치관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한 사건에 대한 사법부터 재판이 문제되어 있는 것은 ‘나타난 증거’에 의한 진실규명보다는 ‘숨어서 병균으로 돌아다니는 범법사실’과의 형평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 분명하게 물적으로 증거가 남아 있는 사건만 단죄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형평이 아니다. 숨어서 정의를 좀먹고 있는 사안의 규명은 절대 ‘정의의 형평화’를 위하여 절대 필요하다. 변호사들이 달고 다니는 뱃지는 저울이다. 이는 정의(正義) 못지않게 형평이 법의 생명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루스(Selus)가 말하기를 법의 생명은 ‘정의와 형평’이라고 하였다. 지금 법의 발동은 반정의,반형평의 경우가 많다. 한 시대의 ‘부정의’가 우리국민의 가슴에 남아있으면 정의가 죽어있는 국가이고, 반형평만 키우는 결과가 된다. 정치인·대기업가 기타 갑의 지위에 있는 자는 모름지기 가치관이 정의롭고, 형평적 이어야 한다.

‘법적안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범법사실을 덮으면 그것이 부메랑 되어 우리의 자손들을 더욱 반정의, 반형평적으로 만들어 간다. 오늘의 역사는 내일의 거울이다. 툭하면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는 것은 정의와 형평으로부터의 도피로 보면 논리의 비약일까.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당한 일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부집단이 우리국민에게 준 고통을 외면하려는 사람이 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외침을 탄압받은 사실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과정이 민주적이고, 투명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쟁하듯이 목적달성에만 집착한 것이 허다하다.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국가의 장래를 개혁·개선하는 것이 된다.

송희성 전 수원대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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