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자서전 출간에 맞춰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행보가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택시운전사’의 실제주인공 김사복 씨 아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계신 나눔의 집을 방문해서는 “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쓰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적극 추천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예방을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한 독일의 진정한 사죄와 주변국과의 화해‘협력 사례가 동북아 지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덕담했다. 택시운전사의 또 다른 주인공 위르겐 힌스페터(토머스 크레취만 분)가 독일 사람이라는 것도 슈뢰더의 방한의 관심을 고조시켰을 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은퇴한 노 정객의 행보로는 이례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슈뢰더의 방한과 함께 떠오른 것이 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은 모습이다. 흐린 날씨에 기온도 쌀쌀했던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는 독일 총리로는 처음으로 전후 25년 만에 폴란드를 방문해 단절됐던 폴란드와의 국교정상화 조약에 서명한 뒤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섰다.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에 거주하고 있던 7만의 유대인이 그들을 학살수용소로 보내려는 나치에 저항하다 5만 여 명이 희생된 곳이었다. 망자들을 애도하며 머리를 조아린 브란트는 한 걸음 물러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빌었다. 브란트의 사죄는 동방정책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듬해 빌리 브란트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기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 5일,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장애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집단으로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이어졌다. TV뉴스와 신문기사로 그 장면을 일별한 뒤 감당키 힘든 분노와 무참함을 느껴야 했다. ‘누가 그들을 무릎 꿇게 했을까? 우리네 현실은 어쩌다 이토록 심하게 일그러져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두통과 흉통이 느껴졌다. 한동안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 더구나 집단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차분히 생각해 볼 일이다. 보통은 죄를 지은 사람이 무릎을 꿇는다. 죄인이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할 때 무릎을 꿇는다. 그렇다면 장애 학부모는 죄를 지은 사람인 걸까. 설령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다 치자.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그들의 사죄를 받고 용서를 말할 자격을 가졌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되지 않는다.

장애가 죄일 리 없다. 장애 학부모가 죄인일 리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들을 무릎 꿇게 했다. 죄라면 장애를 가진 자녀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려했던 것일 테다. 그렇다. 장애는 죄가 아니지만 장애 자녀를 위한 교육시설을 가지려 한 건 죄가 되는 세상이다. 먼 옛날 미개한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무릎 꿇은 장애 학부모를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일으켜 세우거나 위로하지 않았다는 데서 다시금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도 냉혈한인 그들은 또 누구인가. 그들 역시 자녀를 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못된 정치인의 꾐에 속아서 집값을 올리기 위해, 자기지역에 더 나은 시설을 유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기심이 빚어낸 악은 그렇듯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게 악인지도 모른 채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악을 살고 있다.

‘택시운전사’를 관람하던 중 슈뢰더 전 총리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함께 관람했던 기자는 슈뢰더가 눈물을 흘린 장면은 광주를 빠져나온 김사복이 순천에서 딸의 신발을 산 뒤 집으로 가다가 급거 핸들을 꺾어 다시 광주로 향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국적이 다르고 역사경험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사람의 감정이란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광주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김사복처럼. 슈뢰더 전 총리도, 1천3백만의 평범한 관객들도 결국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사람은 피부색으로도, 성별로도 차별해선 안 된다고 배웠다. 장애와 비장애 역시 차별의 기준일 수 없다. 우리의 이기심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던 장애 학부모들께 뒤늦게나마 사과드린다.

최준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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