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에 있다. 동구릉은 한양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서오릉은 한양 서쪽에 다섯 개의 능, 서삼릉은 세 개의 능이 있다는 뜻이다. 조선은 1392년 세워져 1910년 망할 때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왕을 배출했다. 왕릉은 모두 42기이며 이 가운데 2기는 북한 개성에 있다. 태조의 첫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정인왕후의 후릉이다. 나머지 40기는 서울 근교에 있다.

동구릉에 있는 왕릉 중 가장 좋은 자리는 역시 태조의 건원릉이다. 매표소에서 건원릉 가는 길은 맑은 시냇물을 끼고 도는 숲길이다. 잠깐 걷는 길이지만 속세의 찌든 마음이 시원스레 씻기는 기분이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외국인을 상대로 관광코스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북경 근처 명13릉을 관광 상품화하여 많은 외국관광객이 찾는다. 그러나 규모만 거대할 뿐 조선 왕릉처럼 아기자기 하지도 않고, 좋은 자연도 느낄 수 없다.

오른편에 있는 수릉과 현릉을 지나면 건원릉이 보인다. 홍살문에 앞서 금천교라는 돌다리가 나온다. 건너가는 것을 금한다는 뜻으로 건너편은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금천교에서 건원릉 좌측과 우측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이 합수한다. 옛 풍수서에 “두 물 사이에서 맥을 찾고, 두 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혈을 찾으라”고 하였다. 건원릉이 이에 딱 맞는 지리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에 오르면 뒷문으로 능이 보인다. 왕은 이곳에서 능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고 돌아갔다.

건원릉은 산맥 끝자락이 볼록하게 솟은 돌혈이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 왕릉이 있는 능선 위로 올랐다. 이곳은 봉분의 풀이 잔디가 아니고 억새풀이다. 이성계가 고향을 그리워하자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조성한 것이다. 이 때문에 벌초도 하지 않는다. 봉분에서 앞을 바라보면 좌청룡과 우백호 능선들이 겹겹으로 교차하고 있다. 그 모습이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듯 공손하다. 산들이 앞을 겹겹으로 가로질러 있으면 혈의 기운이 앞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그만큼 혈의 역량도 커지고 발복도 오래간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특별하게 이곳을 향하는 안산이 없다는 점이다. 안산은 부인과 같은 것이다. 이성계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인복이 없는 것 같다. 그는 평소에 첫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보다 둘째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세자도 조선 건국에 공이 큰 방원보다 강씨의 소생인 방석으로 삼았다. 그러나 스므 살이나 어린 강씨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더구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방원이 난을 일으켜 강씨소생의 방번과 방석을 살해했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유다. 이성계는 죽어서 강씨와 같이 묻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건원릉이 대지임에도 왠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능 뒤로 가면 입수도두가 있다. 대단히 커서 건원릉이 대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입수도두란 용맥을 따라 전달된 생기가 모인 장소다. 기가 모여 있기 때문에 볼록하다. 그 뒤로 이어진 용맥을 따라 가보면 변화가 활발하다. 특히 현무봉에서 아래로 내려간 용이 다시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결인속치처의 모습이 힘이 있다. 이곳의 태조산은 한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우뚝 솟은 수락산(640.5m)이다. 중조산은 불암산(509.6m)이다. 주룡은 태릉고개를 넘어 구릉산이라고도 부르는 검암산(178m)을 소조산으로 만들었다. 검안산은 순하게 생긴 산이다. 좌우측으로 팔을 벌려 동구릉 전체를 끌어안으며 큰 보국을 만들었다. 건원릉은 좌측으로 뻗은 능선이 힘 있게 달려가 현무봉을 만든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성계는 자식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을 보고 고향 함흥으로 가버렸다. 왕이 된 이방원은 차사를 보내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셔오려고 했지만 이성계는 차사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회암사 주지로 있던 무학대사가 간곡하게 요청하여 회암사까지 오기는 했지만 한양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을 자신의 능지로 정하고 나서는 곧바로 한양으로 갔다. 가는 도중 고개를 넘으며 다시 이곳을 바라보고 “이제야 내 근심을 잊을 수 있겠노라”라고 하였다. 그 고개가 지금 서울 중량구 망우동에서 구리시로 넘어가는 망우리고개다. 태조는 자신이 세운 조선이 오랫동안 이어져 나가는 것을 원했다. 이곳에 자신이 묻히면 후손들이 발복을 받아 조선을 잘 지켜나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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