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오후 4시쯤 전날 서울 창경궁을 출발한 정조대왕 능행차 행렬이 화성의 도시인 수원에 도착했다. 이 능행차는 1795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수원에 행차했을 때의 장면을 그린 전체 8폭의 ‘화성능행도’를 바탕으로 재연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현재 행정구역상 수원이 아닌 화성시에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를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다.

현재의 수원은 조선 정조 때 화성 축조와 더불어 새롭게 조성된 도시이다.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째인 1789년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의 진산인 화산으로 옮기고 팔달산 동측으로 수원의 읍치를 이전했다. 이어 1793년에는 수원 고을의 위상을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이듬해인 1794년부터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료했다. 이를 통해 수원은 완전히 새로운 성곽도시로 탈바꿈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으로 옮김과 동시에 화성을 축조하고 능행로를 새로이 닦았다. 이 능행로가 생겨남으로써 조선의 지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호서, 호남으로 가는 새로운 대로의 출현이다.

능행길의 출현으로 수원은 경기도 광주와 더불어 삼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상하였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수원을 거쳐 천안과 공주로 가는 길과 광주를 거쳐 충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수원을 경유하는 길은 정조 이후에 발달한 것이며 그 중심 역이 바로 장안문 밖에 있던 영화역이었다. 화성이 생기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떠나는 주요 출발점은 양재역이었는데, 능행길의 출현과 더불어 영화역이 신설되고 양재에 있던 찰방역이 영화역으로 이관되었다. 말하자면, 서울과 삼남을 이어주는 길의 중심축이 양재에서 수원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그런데 능행길의 더 중요한 의미는 다른 데 있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수원을 포함한 경기 남동부는 서울로부터 매우 소외된 지역이었다. 조선의 모든 부와 권력은 서울을 중심으로 동서로 이어지는 긴 강상수로를 축으로 하여 집중되어 있었다. 정조의 화성 축성은 오랫동안 소외된 이 지역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동서로 편중되어 있는 부와 권력을 분산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화성 축성과 더불어 수원에 시장이 발전하고 또 수원을 중심으로 광역 물류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 탄신 60주년을 맞는 1795년 제1차 수원 행차를 시작으로 총 13차례나 수원을 방문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화성 능행차는 단순히 참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조의 화성 축성은 오늘날의 지역균형발전 프로젝트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며, 그의 능행차 역시 이런 관점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정조의 능행차 퍼레이드는 수원의 지역 축제인 수원화성문화제의 한 프로그램이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화성문화제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리 퍼레이드 축제로 발전시키겠다”고 한다. 수원시에서 나오는 각종 팜플렛이나 책자에는 정조의 능행을 뒤주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를 향한 아들의 효심을 상징하는 행위로 소개되어 있다.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조의 효와 수원의 효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수원이 효의 도시가 되려면, 수원시민들이 정조의 능행에 감발 받아서 효를 일상에서 실천하고 소중한 가치로 떠받들 때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수원은 179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 화성의 축성과 함께 교통과 물류의 도시로 시작되었고, 그 연속선상에서 일제 강점기 경부철도와 더불어 성장하였다. 이제 220년이 흘러 세상은 변했고, 수원의 위상도 달라졌다. 우리 앞에는 아름다운 화성을 빛내고 정조의 능행길의 의미를 새롭게 되살릴 과제가 놓여있다.

김창원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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