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2월 4일 베이징의 신문 ‘천바오 晨報’ 부록판에 놀라운 연재소설이 실린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듬해 2월 12일까지 매주 또는 격주로 연재됐다. 정확한 이름도 없는 날품팔이 농민 주인공 아큐를 내세워 당시 중국 민족의 허약함을 예리하게 비판한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작 ‘아큐정전’이다. 소설은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처형되는 아큐의 운명을 그렸다. 작품을 통해 루쉰은 신해혁명의 본질을 비판하면서 중국 혁명에 의해 진정으로 구원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당시 아큐정전을 읽은 중국 독자들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아큐의 기질에 충격을 받는다. 결국 아큐정전은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면서 신문방송학에서는 아큐정전 속의 신문학 승리를 확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 루쉰의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로 발전한다.

작품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도 혼란과 실수를 거듭하고 압제와 암흑을 반복하는 중국의 사회 상황에서 탄생했지만 지금까지 중국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주인공 아큐는 이름이나 출신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예전에 어떤 행적을 가졌던 사람인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토지신을 모신 사당에서 살면서 고정된 직업도 없다. 그리고 아주 바쁜 때 일용직 일손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정도의 존재다. 단지 그는 자존심만큼은 남보다 강하다. 하지만 자존심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워한다. 그리고 독선적이고 반항적이다. 그렇다고 무슨 신념도 없다. 깊이나 지속성이 있을 리 없다. 

지난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생방송으로 한 긴급 브리핑 뉴스를 보고 한국식 신(新)‘아큐정전’을 연상했다. 물론 소설 속 배경이 신해혁명 등 우리의 새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 혁명과는 거리가 있고 그 안의 인물들도 지금의 영악한 인물 군과 비교하기에 분명 무리가 있지만 뒤늦게 보수통합을 운운하는 야당들의 행태를 보면 영락없는 아큐의 그것이다. 그리고 태극기를 앞세우기만 하고 제대로 된 논리나 당위성 등이 부족해 고래고래 마이크에만 의존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그늘 아래 있었던 인사들의 서투른 몸짓 역시 보기와 듣기에 그저 민망함에 그치면서 아큐의 괜한 자존심과 실루엣 되고 있다. 진정 중도세력의 지지를 받으려는 노력이 이 정도라면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피로감에 지친 중도세력의 시민들을 되찾을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즈음에 뉴스들은 일제히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며 법원이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과 여중생 강제추행 살인, 추행 유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어금니 아빠’ 이영학과 관련한 여러 얘기들로 뒤숭숭하게 메우고 있다. 심지어 한 종편은 싸구려 단골 패널들을 모셔 이영학에 관한 다큐성 뒷얘기들로 수 시간째 침을 튀겨가며 흥미성 토론을 이끌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선인지 분간을 못해 생기는 해프닝 정도로 밖에 이해가 안가는 비서실장의 브리핑성 뉴스와 다를 게 없다. 

다시 꺼내 밟아 보겠다는 의도가 강한 그 중대 발표는 들어보니 말 그대로 참담한 국정 농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과연 차이가 나는 30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인지, 그 급박한 상황 속에 이런 보고의 차이가 낳았을 상황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헷갈리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쌓여있는 안보나 경제 현안들이 과연 세월호를 다시 불러내 시간 차이를 따져 묻는 것보다 시원치가 않은 것인지부터 해명해야 할 사안이다. 매스컴을 불러 모을 때는 그 만한 일이 있어 그 중요도를 누구든 따져 묻기 어려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에서다. 물론 그 긴급하다는 발표로 인함인지 박 전 대통령 구속 연장은 현실이 됐고 세월호와 관련한 강경한 얘기들이 꺼내질 태세다. 

마치 이것은 아큐를 둘러싼 소설 속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세상 잘 만나 형편 좋아진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떡고물을 얻어먹으려 하고 사람들의 평판이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도둑질한 물건임을 알면서도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하는 배경안의 그것과 차이점이 없어서다. 아큐는 별생각 없이 혁명을 외치고 돌아다닌 일로 누명을 쓰고 잡히고 결국 온 마을을 끌려다닌 끝에 총살되지만 이런 아큐에 세상 사람들은 재미없는 사형수로 기억할 뿐이다. 얼마 전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남한산성’ 영화를 본 젊은이로부터 “그저 가슴이 먹먹했고 답답했으며 마치 지금의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전술핵을 말하면 보수요, 대화를 얘기하면 애국자고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는 공식을 누가 만들었는가. 지금 우리는 시급한 국가 현안을 뒤로하고 새로운 아큐를 만들어 처단해야 할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루쉰은 말했다. “먼저 대담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는 할 수도 없고 더 뒤에 가서는 당연히 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게 된다.”

문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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