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대 대제학을 지낸 양촌 권근과 그의 둘째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묘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능안로 377-15)에 위치한다. 풍수가들 사이에 조선8대명당으로 알려질 만큼 유명한 묘다. 풍수 초보자도 첫눈에 보면 대혈임을 알 수 있는 자리다. 묘역 아래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제일 위의 권근, 가운데 권제, 제일 아래 권람 묘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역량이 큰 자리다. 한 용맥에 대혈 3개가 있는 것은 매우 드믄 경우다.

안동권씨는 신라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였다. 시조인 김행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태조 왕건은 김행이 임기응변인 권도(權道)에 능하다며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 양촌 권근(1352~1409)은 고려와 조선의 양 조정에서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석학이다. 특히 그는 이성계가 새 왕조 권위를 드러내고자 만든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제작에 참여하였다. 각석 하단에는 권근이 제작 과정을 설명한 글이 새겨져 있다. 권제(1387~1465)는 권근의 차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하며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권람(1416~1465)은 권제의 차자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수양대군과 뜻이 맞았다. 그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세조를 등극시키는 공을 세웠다.

유명한 묘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곳도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양촌이 세상을 떠나고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안장하였다. 그러다 이곳이 더 좋다는 지관의 말에 따라 세종 22년(1440) 이장하였다. 이장임에도 불구하고 문하의 수많은 유생들이 참가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참 광중을 파고 있는데 한 도승이 손에 바가지를 들고 나타나더니 “이곳에 물이 나면 물 한바가지만 얻어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상주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데 불경스럽게 광중에서 물이 난다고 하느냐”며 도승을 혼내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광중에서 수맥이 터져 물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대경실색한 상주들은 도승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물이 나는 자리라는 것을 알면 그 대책도 알고 있을 것이니, 부디 조상을 물속에 묻는 불효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도승이 부적 하나를 쓰더니 광중에 넣고, 앞산을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산 정상에 우물을 파면 수맥이 끊길 것이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인부들이 앞산에 달려가 정상에 우물을 파자 노승이 써준 부적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을 옮겼다고 하여 수이산(水移山)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수리산(水理山)으로 쓰고 있다.

이곳의 산맥은 백두대간 속리산 천황봉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까지 이어졌다. 음성 보현산(483m)에서 분지한 산맥은 부용산(645.2m)과 수레의산(678.7m)을 거친 후 주산인 수리산(462.6m)을 세웠다. 수리산에서 서북 방면으로 길게 내려온 맥은 묘역 앞에 보이는 산을 만든다. 그리고 원을 그리듯 돌아 현무봉을 세우고 앞의 산을 바라보며 멈추었다. 이를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 한다. 용이 돌아 앞의 조종산을 바라보고 혈을 맺는다는 뜻이다. 용이 한 바퀴를 돌려면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회룡고조혈에는 대혈이 많다.

제일 위에 있는 권근 묘 뒤를 지나 현무봉으로 오르다 보면 잘록한 결인속기처가 보인다. 이곳 흙을 살펴보면 매우 순하고 깨끗하다. 용맥이 험한 기를 털고 순한 생기로 변했다는 뜻이다. 결인속기처 좌우에는 산들이 막아주고 있어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이를 공협사라고 하는데 용맥의 기가 바람으로부터 흩어지지 않도록 보호 해준다. 결인속기처를 확인하고 다시 묘지 쪽으로 내려오면서 보면 용맥이 좌우로 변화한다. 마치 큰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기가 살아 있다는 뜻으로 힘도 강함을 알 수 있다.

권근 묘 뒤에는 입수도두가 있고, 양쪽으로 선익이 있으며, 앞에는 순전이 뚜렷하게 있다. 이곳에 혈을 맺은 용맥은 살짝 방향을 바꾸어 내려오다 권제 묘에도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만들어 기를 모아 혈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 마지막에 권람 묘에도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만들어 혈을 맺었다. 주변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산들은 귀인봉, 일자문성, 노적봉 등이 즐비하다. 수구 또한 좁아 기가 조금도 새어나갈 수 없다. 안동권씨가 조선시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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