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역사를 다룬 것이니 단 한 번의 반전도 없을 것이고 누구나 다 아는 결말일 것이라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한 편의 수묵화요, 한 권의 소설 같다’는 어느 평론가의 리뷰에 끌리어 뒤늦게 ‘남한산성’이란 영화를 보았다. 무려 381년 전의 일이지만 명(明)이냐, 청(淸)이냐를 강요당하는 그때의 상황이 마치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여전히 고단한 대한민국의 지금의 모습을 보는듯하여 두 시간 내내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였으나 그래도 애써 영화 자체로서의 재미를 찾았다. 흐르는 물 같은 이병헌과 타오르는 얼음 같은 김윤석, 두 배우의 불꽃 튀는 말의 대결도 볼만했지만 내겐 청나라 군사들과 그들의 황제인 ‘칸’이 말하는 만주어가 더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 말이 그리 생경하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수년 전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에서 만주어를 들어본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 영화에서는 만주어가 상당한 비중으로 많이 쓰였는데,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 덕분에 영화를 보는 재미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이번 남한산성에서 청태종의 역할을 맡은 김법래는 그 존재감이 탁월했다. 특유의 억양, 발음, 묵직한 음성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는데, 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의 운명과 극명하게 대비되었기 때문에 더 압도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주어는 거의 사멸 언어이다. 2007년 뉴욕타임스는 중국 동북부의 고립된 마을인 싼자쯔에 살고 있는 80대를 넘긴 노인 십여 명만이 만주어를 쓰고 있을 뿐 만주어의 사멸은 시간문제라고 보도했다. 그 후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생존하는 노인이 몇 명이나 될까? 앞서 유네스코는 ‘세계 사멸 위기 언어 지도’를 발표하면서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6천800개 안팎의 언어 중 절반이 곧 사라질 위기라 했다. 권력과 자본에 밀린 많은 힘없는 언어들이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후금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청은 모든 공식문서를 먼저 만주어로 작성 후 중국어를 덧붙였다. 소위 만한합벽(滿漢合璧)이다. 그 유산 중의 하나가 베이징의 자금성에 붙어있는 현판들이다. 거기엔 눈에 익은 한자와 병행하여 마치 아랍어를 세워놓은 것 같은 만주어가 써져있다. 그런데 청 왕조의 4대 황제인 강희제가 ‘강희자전(康熙字典)’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 내에서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였고 청나라 말기 서태후 시대에 와서는 궁정 내 문서에 아예 ‘만한합벽’ 방식을 포기하고 중국어인 한문만을 쓰도록 해버렸다. 이후, 압도적인 한족 문화의 영향으로 만주족들은 스스로 그들의 언어를 잊고 중국어에 능숙해져 버렸다. 자발적 동화인 것이다.

자발적 동화로 소멸되어가는 언어가 우리 안에도 있다. 제주도의 젊은 층이 미디어 등의 영향으로 우리말 표준어를 쓰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11년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위기 언어 5단계 중 4단계로 분류했다. ‘제주어’는 방언이 아닌 한국어족에 속한 별도의 언어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하다. 아주 오래전에 사멸된 언어 중엔 우리 조상의 언어도 있다. 바로 고구려어이다. 세계적 석학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 균, 쇠’라는 책에서 현재 공유 어휘가 불과 15% 밖에 되지 않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에 관하여 논하면서, 오래전 한반도의 말이 일본어 생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현대의 한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어에서 유래한 것이며 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어는 신라어에 동화되어버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의 단어들이 현대 한국어보다 옛 일본어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는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삼국이 통일되기 오래전부터 고구려어와 같은 한반도의 언어가 사람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 일본인과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연구결과다. 영화 한 편을 보다 곁가지를 치는 즐거움이 솔솔 하다. 우리 뇌의 기능 중 기억력과 사고력을 주관하는 곳이 전두엽이고 이를 녹슬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익히는 일이라 한다. 이 참에 마음에 뒀던 외국어 하나쯤 용기 내어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듯싶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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