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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대한민국 젖줄 '한강'… 물길에 스며든 산업발전의 역사

(16)남양주시, 한강에 늘어선 근대문화유산

이현정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남양주시는 남북으로 긴 모양으로 솔방울을 세워놓은 것 같다. 서쪽에 노원구와 구리시, 하남시가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북쪽은 의정부시와 포천시에 접하고, 북동쪽으로 가평군과 양평군으로 이어져 남한강과 팔당호를 거쳐 한강으로 연결된다. 고려와 조선 시대 왕족의 능묘와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 등으로 유명하다.

남양주시는 넓다. 서울의 75% 정도이다. 양주군 시절을 거쳐,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남양주군이었다. 그 후 남양주군과 미금시로 나뉘었으나, 1995년에 다시 합쳐 방대한 면적이 되었다. 남양주의 행정구역은 5읍, 4면, 7동으로 나뉜다. 진접읍, 오남읍, 화도읍, 와부읍, 진건읍으로 5개 읍과, 별내면, 수동면, 조안면, 퇴계원면의 4개면, 호평동, 평내동, 금곡동, 양정동, 지금동, 도농동, 별내동으로 구성되었다. 봉선사, 광릉, 국립수목원(옛 광릉수목원)이 있는 진접읍, 팔형 저수지와 오남 호수공원을 자랑하는 오남읍, 고려와 조선 왕이나 왕비 문∙무신의 묘역이 많은 진겁읍에는 광해군 묘,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과 능원대군의 묘는 화도읍에 있다. 덕소로 유명한 와부읍은 조선 초기부터 한옥 기와를 만들던 장인이 모여 살던 지역이다.

예전에는 산으로 에워싼 분지와 농업이 번성한 평지로 나뉘어 읍과 면이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며, 개발제한구역이 많은 전통적인 농업지역이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0년대에 오남지구, 장현지구, 창현지구, 덕소지구, 청학지구 등에 아파트가 생기고, 수동, 마석 등에 전원주택이 늘어섰다. 지금도 별내신도시, 다산신도시, 호평지구, 평내지구 등으로 개발 중이다. 이제 남양주시는 반은 도시이고, 나머지는 농촌으로 공존한다. 합치고 나누는 과정을 거쳤고, 드문드문 개발한 지역이 많아 시를 대표할 중심을 찾기가 힘들다.



예전부터 교통은 좋다. 남양주를 지나는 국도는 3개이다. 인천역에서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을 연결하는 6번 국도는 남양주시청 제2청사를 지나고, 인천역에서 강원도 고성군 상리로 가는 46번 국도는 남양주 진관 일반산업단지와 마석을 거쳐간다. 이 국도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남양주를 남북으로 나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양촌나들목에서 강원도 철원군 김화교차로로 가는 47번 국도는 진접읍과 광릉을 따라 남양주를 남북으로 비스듬하게 지난다. 강원도 춘천이나 동해안을 가려면 남양주 도농 삼거리를 지나야 했다. 이삼십 년 전 일이다. 한편 경춘선과 중앙선 기차를 타고 한강, 팔당댐, 남한강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 한강에 늘어선 근대문화유산



남양주 남쪽에 한강과 팔당댐, 북한강을 따라 근대문화유산이 모여있다. 한강을 관리하던 시설과 철도 관련 시설이 대부분이다.



1. 한강을 관리하던 토목구조물

조안면 능내리에 고안수위관측소와 팔당댐이 있다. 고안수위관측소는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여 홍수와 가뭄 등을 대비했다. 북한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강 안에 있는 관측소와 연결하는 교각과 다리가 등록문화재 제593호이다. 관측소는 키가 큰 등대와 비슷한 모습으로 높이 16.76m이며, 도로에서 연결된 다리 길이는 24m이다. 고안수위관측소는 1914년부터 1994년까지 수위를 조사했으며, 1998년에 폐쇄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29년에 발표한 조선하천조사서에 관측소에 관한 기록이 있다. 1917년까지 조사자가 눈으로 물 높이를 보아 어림잡아 헤아렸으나, 1930년대부터 좀 더 정확한 관측을 한다. 고안수위관측소는 수위측정기가 있는 관측소에 수직으로 우물통을 연결하고 우물통 물속에 띄워둔 물체의 높이가 변화하는 것으로 수위를 확인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강 물의 높이에 따라 우물통 속의 물 높이도 달라져 물속 물체가 위아래로 움직이면 수위측정기기의 도르래가 돌면서 수위를 기록지에 기록하였다. 아마도 이곳도 1910년대에는 간단한 방법으로 물 높이를 보았으나, 점차 정확하게 관측하는 근대적 방법을 이용했을 것이다. 관측소 안내판에 건립 당시의 토목 기술과 수위측정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같은 방식의 관측소가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도 있다. 고양행주수위관측소도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으며,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였다.



1966년에 착공하여 1973년에 완공한 팔당댐은 서울 수도권의 수돗물과 전기를 공급했으며, 당시 경제 개발에서 매우 유용한 댐이다. 이 주변은 상수원 보호구역 수문이 15개 있으며, 국내 최초로 판자 모양의 널말뚝으로 물막이 공법을 시도하였다. 댐의 폭은 20m, 높이 16.75m로 건설 기술의 발전과 근대 산업의 과정을 녹여낸 대규모 건설공사였다.



2. 철도시설

1939년 7월에 개통한 경춘선은 경춘철도주식회사에서 만든 사설 철도로, 광복 후에 국가 소유가 되었다. 당시 경춘선은 강원도 목재를 수송하던 화물철도로 북한강 철길을 따라 춘천과 서울을 다녔지만, 1970년대 이후는 통기타를 둘러매고 여행을 떠나던 젊은이에게 낭만을 주었다. 추억의 단선철도였던 경춘선은 2010년에 복선전철로 수도권 전철 경춘선이 되었으며, 무궁화호의 열차 운행은 폐지됐다. 1939년에 건설한 철도 교각은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와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를 연결한 북한강 철교가 남아있다. 철교 교각은 14개로 수심의 차이에 따라 교각의 두께가 다르고 간격도 넓어진다. 이제는 남한강 자전거길이라 불리며 자전거를 타고 북한강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개통한 중앙선이 경의중앙선으로 공사를 하며, 팔당역에서 양수역까지 직선 철로를 만들었다. 구부러진 옛 중앙선 철길은 자전거 도로로 이용한다. 능내역이 자전거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능내역은 작은 역으로 한 개의 철로로 다닌 중앙선에서 역과 역 사이에 교차나 대피할 수 있는 선로와 신호장치가 있던 신호장이었다. 1956년에 역무원은 있지만, 역장이 없는 역으로 시작하여, 1967년에 역장이 배치되기도 했었으나 1993년에 다시 간이역이 되고 2008년에 폐역이 되었다. 이제는 남한강 자전거길을 다니는 관광객이 몰려 기차역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빌려 타거나 능내역을 구경한다. 옛 능내역을 재현하여 당시 안내판과 청량리에서 원주와 제천을 거쳐 단양, 영주 등을 지나 안동까지 다니던 열차 시각표, 여객운임표가 전시되어있다. 승차권을 발매하지 않고, 열차를 탄 후 승무원에게 승차권을 사던 보통차표가 벽에 붙어있고, 능내역을 배경으로 찍은 옛 사진을 액자에 걸어 일반인의 소소한 추억을 남겼다.



옛 팔당역의 운명은 다르다. 경의중앙선 팔당역에서 남쪽으로 750m 정도 내려가면 폐역 팔당역이 있다. 옛 팔당역은 1939년에 건립하여 그해에 보통 역이 되어 기차가 드나들었다. 1989년에 시멘트 공장과 전용 철로 공사를 시작하여, 2개의 전용선을 깔고, 1991년부터 시멘트 공장이 영업했다. 승강장 내에 기차역사가 있는 독특한 곳으로 일찌감치 기차역, 광장, 철로, 150m 되는 좌우 승강장이 등록문화재 제295호로 되었다. 기차역사는 간단한 직사각 평면으로 60㎡의 면적이며, 매표창구가 있는 대합실, 사무실, 숙직실이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역 내부에 전시물을 설치하여 개방할 예정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비공개라 출입할 수 없다. 2008년에 사진을 찍으려고 옛 팔당역에 있는 열차에 올랐다가 감전 사고가 난 후 역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출입을 통제한다. 연두색 철망 울타리 사이에 보이는 등록문화재 안내판은 잡풀에 가려져 읽을 수가 없고, 고압 전류가 흐른다는 경고판이 눈에 띈다. 옛 팔당역은 관리되지 않지만, 시멘트 회사의 화물전용 역으로 쓰인다. 덩그러니 보이는 시멘트를 나르는 화물열차와 시멘트 공장 시설이 안쓰럽다. 특히 시멘트공장으로 통하는 팔당 터널 입구에 외부인 출입금지와 건조물 침입죄로 고발할 수 있다는 안내가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줄 정도이다. 옛 팔당역을 남겨두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없어진 유산

2008년에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조사한 ‘보전 대상 문화유산 목록조사작업’ 보고서를 보고 찾아간 삼패동의 벽돌 가마는 없어졌다. 보고서는 벽돌 가마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1964년에 경기연와가 벽돌을 생산할 때부터 있던 가마였으므로 그 이전에 다른 벽돌 공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적었다. 이곳에서 벽돌을 굽던 가마는 호프만 방식이었다. 독일인 호프만이 1858년에 발명한 방식으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붉은 벽돌을 구웠다. 벽돌을 연속으로 만들 수 있어 획기적이었으나 이제는 생산성이 낮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삼패동 벽돌가마는 높은 굴뚝과 벽돌가마가 온전하여 산업시설로 가치가 높았으나, 업종 변경과 소유권 이전 등을 거치며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대형버스 주차장으로 사용한다.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지금도 개발하는 남양주는 도시와 농촌이 엉킨 모습이다. 남겨두어야 할 문화유산을 방치하여 소멸을 기다리거나, 소리 없이 없애는 경우가 있다. 이제 개발과 보호가 동행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이다.

이현정 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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