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장수 계백장군 묘는 충남 논산군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서기 660년 7월 9일 신라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이 가까이 있다. 신라 김유신은 신라를 출발하여 대전 식장산에 있는 탄현 고개를 넘어 백제 땅으로 진군해왔다. 그리고 갑천을 거슬러 벌곡에서 함박봉 고개를 넘어 황산벌 들판으로 내려왔다. 급보를 접한 백제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며 신라군을 막도록 했다. 본래는 전략 요충지인 탄현에서 막아야 했는데 이미 때가 늦었다.

황산벌은 깃대봉과 함박봉 서쪽 야트막한 분지 안에 있는 들판이다. 계백은 신라군이 분지를 넘어 부여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야산자락을 이용하여 3개의 길목에 진을 쳤다. 이곳이 뚫리면 부여까지는 평지다. 평지에서는 5천의 군사로 5만의 신라군을 당해낼 수 없다. 때문에 이곳이야말로 백제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죽기를 각오한 계백과 5천 결사대는 신라군의 네 번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김유신은 마음이 급했다. 당나라 소정방과 9월 10일 백강 하구에서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백제 땅을 공격하는 주력부대는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당군이다. 신라군은 당군의 식량과 보급품을 책임졌다. 군대에 보급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작전에 차질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김유신 동생 흠춘의 아들 반굴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진하다 죽었다. 이어 좌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도 적진에 뛰어 들어 두 번이나 사로잡혔다가 죽었다. 어린 화랑들의 죽음을 본 신라군은 분기충천하여 파상공격을 하였다.

방어선이 뚫리자 계백과 그의 결사대는 밀리고 밀려 지금의 묘역이 있는 곳까지 왔다. 이곳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병사들의 시체는 백제 유민들이 거두어 임시로 묻어주었다. 이곳 지명이 가매장 했다는 가장골로도 불려진 이유다. 묘역 뒷산을 충장산이라고 부르는데 충성스런 계백장군이 묻힌 곳이라는 뜻이다. 또 수락산이라고도 하는데 장군의 목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다. 지금은 성역화 되어 정비가 잘 되어 있지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수많은 무연고 묘들 중에 그때 전사한 병사들의 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계백장군 묘도 계백장군이 묻힌 자리인지 확실치 않았다. 김유신은 전쟁이 끝난 후 계백의 시신을 찾도록 했지만 찾지 못했다. 비록 적장이지만 훌륭한 장수를 후하게 장사지내주는 것은 무장의 도리다. 그러나 당시는 소정방과 약속 때문에 시신을 수습해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자리는 1966년 찾았다고 한다. 내광이 노출되어 있던 것을 1976년 부적면민들이 지석을 안치하고 내광에 회벽을 완봉한 후 성분을 했다, 그리고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계백장군 묘라고 전해져 온다는 뜻이다.

이 묘를 계백장군의 묘로 기정사실화 한 것은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이때에 비석 전면에 쓰인 전(傳)자를 지워버렸다. 논산시청은 홈페이지에서 이곳을 계백장군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를 적어 놓았다. 첫째는 일반적인 백제분묘처럼 남향을 했다는 점, 둘째는 뒷산이 충장산·충혼산·수락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 셋째는 지명이 가장골·시장골로 불리고 주민들이 장군 묘에 묘제를 지내온 관행이 있다는 점, 넷째는 황산벌이 묘와 근거리에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곳의 산맥은 금남정맥 함박봉(404.4m)에서 비롯된다. 함박봉 서쪽은 아트막한 야산지대로 매봉(146m)과 고정산(145m)를 거쳐 충장산을 세웠다. 충장산 중심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변화가 활발하다. 계백장군 묘는 용맥의 끝자락이 아니고 중간에 위치한다. 이러한 곳을 과룡처라고 한다. ‘과룡지장(過龍之葬)은 삼대내절향화(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절손지지에 해당된다. 전장에 나가기 전 아내와 자식들의 목을 베고 나왔으니 계백의 후손은 아예 없다. 어쩌면 계백장군에게 알맞은 자리일 수 있다.

과룡처임에도 불구하고 묘역은 양지바르다. 또 좌청룡과 우백호가 팔을 벌려 안아주듯 보국을 형성하고 있다. 그 안에 백제군사박물관과 충장사 등 계백장군을 기리기 위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보국 안에 있다 보니 아늑하고 편안하다. 주말이면 가족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군 가족들의 묘지가 없다는 점이다. 살아서 못다 한 정을 나누도록 그 옆에 가족들의 묘지도 만들어 주면 좋겠다. 유명 역사인물 중에 시신을 잃어 버려 가묘를 한 경우는 허다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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