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UN에서는 ‘18세~65세까지는 청년, 66세~79세까지는 중년, 80세 이상은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 이라는 새로운 연령기준을 제시하였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이다. 지금은 ‘환갑’ ‘고희’이라고 해서 누구도 “나이가 많으시군요” 하지 않는다.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이 때 역시나 문제는, 출산율이다.

가임여성 1명 당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2016년 1.17명으로 최악의 출산율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 합계출산율이 1.1명대로 떨어진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는 보도를 접하며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운영 될 것인가 걱정을 금할 수 없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은 일등, 출산율은 꼴등이라는 지금의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저출산 대책으로만 무려 약 100조원을 지출했고 민간의 수많은 전문가와 언론매체도 몇 년 동안 입을 모아 저출산에 대한 국가의 위기를 거론하고 있음에도 많은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충분히 지원하고 배려하지 않으면서 출산과 양육이라는 원초적 역할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이 화장실에 가면 핸드백을 들면서 기다려 줘야 하고 식당에서 남성이 무조건 밥값을 계산해야 된다는 식의 그릇된 페미니즘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에게 법적으로는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많은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방안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인 타임지는 세계에서 남녀 급료 차이가 가장 큰 상위 20개 국가를 발표했는데 그중 1위가 바로 대한민국 이었다. 동일한 조건에서 비슷한 성과를 내도 여성은 남성보다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출산과 양육은 가계의 대를 잇는 문제를 넘어 사회의 일꾼을 양성하는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국가는 무생물이기 때문에 출산과 양육을 기피하는 것은 근로를 하고 세금을 납부할 국민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고 개인, 특히 여성에게 책임지게 하다 보니 여성은 직장과 출산을 선택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고 커리어를 놓치고 싶지 않은 여성은 자연스레 출산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출산율이 낮지 않은 대다수 복지선진국의 근무환경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직장 내 양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아이의 연령에 따라 탄력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정한다. 임신을 한 경우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신체적 수고가 덜한 부서로 배치된다. 잡지에서 읽은 한 사례를 소개하자면, 미국 코네티컷의 한 고등학교는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교사에게 기숙사를 제공하여 가족과 함께 거주하도록 하고 학생들에게 아기를 돌봐주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기도 한단다. 이 학교의 사례를 통해 부모와 사회가 같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실감한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이 사회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것은 자명한 현실이다. 출산과 양육에서 여성은 주담당자 일수밖에 없는데 신체 능력이나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역할에 대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런 차이가 차별로 연결되지 않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사회에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고 늙어가는 모습은 어느새 당연시 되지 않지만, (소설가 김훈의 글을 빌리자면)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


조성철 한국사회복지공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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