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성남시, 굴곡진 땅 위에 선연한 역동적인 삶의 흔적

굴곡진 땅 위에 선연한 역동적인 삶의 흔적

남한산성의 남쪽이기에 성남이라 불렸던 작은 마을이 99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대도시로 발전하기까지 거칠고 역동적인 성장의 시간이 있었다. 도시의 남쪽에 분당신도시가 초고층빌딩을 높게 짓는 동안 산지의 굴곡 그대로 자리 잡은 원도심은 높은 정점에서 그 시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남의 두 얼굴인 분당과 태평동 원도심을 오가며 시대의 유산들을 찾아보았다.


▶ 기억의 지형학

성남의 탄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태생의 공공연한 비밀은 땅의 굴곡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도시 중심을 지나 원도심에 들어서자마자 큰 도로들이 울렁울렁 오르내린다. 그것도 잠시 태평동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찔한 급경사지에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이 펼쳐진다. 길은 모두 격자형으로 산 너머 끝없이 이어져있다. 산지의 굴곡 그대로 골목이 되고 그 골목을 따라 좁게 집들이 들어섰으며 구불구불한 등고선의 낮은 지점마다 도로가 있었다. 높은 지점에 서면 맞은 편 동네 풍경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다. 서울 해방촌이나 부산 산복도로 등지에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경사지와 아슬아슬하게 놓인 집들을 경험해보았만 태평동의 풍경만큼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 기이함의 원천은 지극히 인공적이란 데 있었다. 1970년대 형성된 광주대단지의 현재 모습이었다.

신도시는 중심도시가 결국 이겨내지 못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다. 1960년대 서울의 인구증가율은 매년 평균 8퍼센트에 육박했다. 도시는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행정도시를 따로 세우려던 서울시의 계획은 빈약한 재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신 천변과 거리에 넘치는 빈민들을 이주시킬 신도시를 만드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300만평 규모의 택지를 조성해서 20만 명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성남시사에는 “성남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특수한 목적 하에 정책적으로 개발된 인공도시에 해당한다”고 설명하며 ‘광주대단지’로 불렸던 성남의 도시화 형성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할지였던 이 지역은 농지가 거의 없는 산지였다. 대부분의 토지가 국유지였기에 토지 수매에 대한 부담이 낮았고, 20만 이주민을 위해 물 공급을 해줄 탄천도 지척에 흘렀다. 지가가 낮아 분양금 회수가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추후 영동과 잠실이 개발되면 서울과 접근성이 높아질 터였다. 남한산성 관광지화 사업에 주력하던 광주군은 신도시계획을 적극 반겼다.

이 지역은 화강암지대인데다 표피가 얇고 암반이 도드라져 택지로 활용되려면 엄청난 토목공사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고려되지 않았다. 택지정리도 되지 않은 허허벌판으로 이주민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가수용 천막에서 살기 시작한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도, 경작할 땅도, 학교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땅에 부동산 투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주민들은 열악한 삶을 견디다 못해 성남출장소를 공격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것이 19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 도시의 역사가 담긴 공원

성남시가 자치시가 된 1973년부터 시 주도하에 본격적인 도시화 과정이 진행되었고, 어느덧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성남은 분당, 판교로 신도시를 넓히며 급격히 발전을 거듭했다. 그 사이 노후된 원도심은 변화를 앞두고 있다. 태평동, 신흥동, 수진동 등 원도심은 주택재개발지구, 환경개선지구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몇 블록은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왔다. 아직 마을 안은 조용하지만 주택지 외곽으로 큰 공사가 잇따르고 있다.

성남출장소 자리에 세워졌던 성남시청은 신청사에 할 일을 넘겨주고 2011년 철거되었다. 시청과 나란히 서있던 성남시민회관(1981년 완공)도 사라지고 이 자리는 시립의료원과 시민회관의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성남하면 떠올리는 모란시장 역시 평소에는 조용하다. 상설시장이 있지만 전통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듯 대부분 영업을 쉰다. 4일과 9일에는 복개된 대원천 위 주차장 부지에 모란장이 선다. 모란시장은 동물 거래로 악명이 높지만 60년대부터 이어진 전통장의 역사는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어 있다.

시대를 증언할 건축물이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최근 성남시는 신흥동의 성남산업단지 제1공단의 일부(4만6천615㎡)를 공원화하고 한국파이롯트와 함께 제1공단의 기억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성남산업단지는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경공업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추진된 것으로 1974년 제1공단이 설립되었다. 80~90년대에는 공단이 큰 변화를 겪었다. 시가지가 팽창하면서 대부분의 공장이 이전하고 도시형 공업 위주로 2004년까지 운영되었다. 대부분의 공장 건물이 헐린 채 공지로 남아있던 이 지역은 2020년까지 시민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한국파이롯트만년필 공장은 제1공단 내에서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건물을 거점으로 삼아 건물과 유물에 대한 조사와 구술 작업 등 제1공단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이어질 예정이다. 공장의 활용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성남 원도심의 역동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로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부산의 고려제강 공장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면서 소외된 지역에 활력을 주었듯이, 기억을 보존하는 세련된 방식으로 공장을 재생한다면 도시가 견지해온 역동성을 원도심에 일깨워줄 수 있지 않을까? 성남의 산업유산의 재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



▶ 시대의 상상, 분당전람회주택

분당신도시에서 찾아가본 곳은 ‘분당전람회주택’이라 불리는 단지다. 널찍하고 한산한 도로를 중심으로 저층 구조의 독특한 구조의 집합주택과 단독주택이 ’L’자형으로 구성된 이 단지는 1994년 건축계를 달궜던 ‘한국의 주거문화94’ 전시를 바탕으로 형성된 곳이다. 대형 아파트 단지 위주로 진행된 신도시의 주거문화를 반성하고 우리 주거문화의 비전을 모색하고자 승효상, 윤승중, 장세양, 김석철, 조성룡, 김원 등 중견 건축가 21명이 작품을 내놓았고 대형건설사가 투입되어 분양을 맡았다. 그러나 건축가들이 내놓은 고급주택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전시장을 찾은 평범한 소시민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개별 건축의 디자인에 치중한 고급주택들이 과연 한국건축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타와 비난 속에 전람회주택단지가 세워졌다.

이름처럼 독창적인 언어를 가진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재료와 구조, 형태가 닮은 것이 없었다. 마당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도록 풀어낸 건물도 있고, 외부로 높은 담이 있으나 중정에서 자유롭게 동선이 이어지는 건물도 있었다. 사암 외장재처럼 지금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유행처럼 쓰이던 재료를 찾을 수도 있었고 학풍이나 스타일에 갇히지 않기 위해 고심한 부분도 엿보였다. 분명 우리 건축사의 한 시대를 보여주는 건물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시대를 넘어선 작품들도 있었다.

그러나 집들이 사택처럼 독립된 채로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부분은 아쉽게 느껴졌다. 일산 단독주택단지처럼 일상의 마을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이 뒤섞이고 만나는 공공의 장소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만 해도 건축가의 사명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자신의 독창적인 건축언어를 정립하는 것이었고, 공공의 영역을 위해 필요한 해법을 제시할 정도의 문화적 깊이에는 이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시에 같은 모양새로 지어져 삶조차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많은 집들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상상이 명백히 남아있는 이 지역은 주목할 만하다. 발전적인 개념을 투사한 주택단지가 국외에는 여전히 보석처럼 존재하지 않던가. 이 집들이 시대를 이야기하는 장소로 남게 되길 바란다.

최예선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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