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주시는 독립운동의 본고장이라고 해야 맞다. 여주 출신으로 의병장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92인에 이른다. 이는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가 약 1천 1백여명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숫자이다. 특히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는 것은 지난 17일이 순국선열의 날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날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1939년 11월 21일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차이석(車利錫) 등 6인의 제안에 따라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순국선열 중에서 김 구 선생을 도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숨은 독립운동가로 여주 출신 엄항섭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주 금사면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난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해 평생을 함께 할 김 구 선생을 만나면서 김구 선생과 함께 한인애국단, 한국독립당을 이끌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러 실무를 맡아본 것으로 전해졌다.

엄항섭 선생은 중국망명 당시에 일명 예빗·엄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가담했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중국 항저우(抗州)에서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후 상해(上海)로 돌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했고, 재 중국 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는 등 역할을 넓혀나갔다.

이어 193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취임하면서 김 구(金九)를 보좌하며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게 된다. 1945년 11월 23일에는 임시정부 요인의 제1진으로 환국해 경교장(京橋莊)을 중심으로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김구의 유일한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문장력이 뛰어나서 김 구 선생의 명의로 발표하는 모든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거의 기초했다는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김 구 선생이 피살될 때까지 그를 보좌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는 안타까운 사연을 남겼다.

또한,독립운동가의 가족답게 배우자인 연미당(延薇堂)과 장녀 엄기선(嚴基善)도 여자청년동맹 및 한국광복진선청년전지공작대(한국광복군의 전신)의 대표 및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1989년 엄항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1990년에는 배우자인 연미당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1993년에는 장녀 엄기선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는 등 엄항섭 선생 일가에 대한 우리의 존경은 높아지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은 독립된 나라에서 자주적인 주권을 펼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광복을 찾으려는 그들의 열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던가? 그리고 우리는 일제의 탄압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열의 조국 사랑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여주시는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와 함께 ‘4·3만세 운동’ 기념식,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등 독립운동의 성지 여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세종인문도시 명품여주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여주시에 이렇게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계셨다는 생각을 하면 더 행복한 여주, 더 발전하는 여주가 되도록 12만 여주시민이 다함께 지혜를 모아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원경희 여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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