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인수대비 배출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의 묘에 신도비가 세워진 곳이 있다.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54-1에 위치한 한확의 부인 남양부부인 홍씨 묘다. 신도비란 정2품 이상의 벼슬이나 학문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의 묘지 입구에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내용은 그 사람의 가족 내력과 생전의 업적을 적는다. 이때 글과 글씨는 당대의 문장가와 명필에게 부탁한다. 신도비 첫머리를 보면 신도비명과 함께 누가 글을 지었고 누가 글씨를 썼는지를 알 수 있다. 글 지은 사람은 찬(撰) 글씨를 쓴 사람은 서(書)로 표시하고 있다. 또 비석 제일 위의 비명은 전서로 쓰는데 누가 썼는지를 전(篆)으로 표시하고 있다.

남양홍씨 부인(1403~1450)은 이조판서 홍여방의 딸로 청주한씨 한확(1400~1456)과 결혼하여 3남6녀를 낳았다. 그중 막내딸이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소혜왕후(1437~1504)다. 홍씨부인은 인수대비가 13살 때 세상을 떠났다. 남편보다 6년 먼저다. 이들 부부 묘는 100리나 떨어져 있다. 풍수를 따지는 집안은 부부지간이라도 일인 일명당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때문인지 외손자가 1469년 13살의 나이로 제9대 왕(성종)이 되었다.

성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외조부인 한란도 훈구파여서 묘에 신도비를 세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38년이 지났음에도 신도비가 없음을 슬퍼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재위 25년(1494) 우참참 어세겸에게 글을 짓도록 하고 임사홍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여 한확의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남양홍씨의 신도비는 성종이 죽자 연산군 3년(1497) 인수대비가 직접 세운 것이다. 글과 글씨는 대제학인 임사홍에게 청했다.

비문에 요청한 내용이 적혀 있다. “왕년에 경이 돌아가신 내 아버지 양절공의 신도비에 글을 써서 아름답게 꾸며 장식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러나 원하건대 삼가 돌아가신 어머님을 부인으로서의 도의와 규방의 예절은 가히 본받을 만한 일이 많으니 비석은 우리 선고 한분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번에도 역시 경의 글씨를 빌어야 하겠으니 원컨대 비문까지 지어 내 선세(先世)의 일을 종결지어 주시오”

신도비의 석재는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운반은 코끼리가 하였다. 조선에 온 코끼리는 기후와 먹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죽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후손들은 부인 묘 앞에 코끼리를 묻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2000년대 초까지는 코끼리 묘라고 전하는 야트막한 봉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에 청주한씨 양절공파 종손·종부들의 가족묘를 조성하였다. 할아버지인 한확에게 가지 않고 할머니를 따라 모인 것이다. 그 바람에 코끼리 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의 태조산은 한북정맥 불곡산(466.4m)으로 양주시청 뒤에 있다. 별로 높지 않지만 암석이 많아 기가 센 산이다. 중조산은 도락산(439.5m)으로 여기서 보면 광적면 일대의 넓은 평야가 한 눈에 조망된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설치하여 한강유역으로 통하는 남북교통로를 통제하였다. 소조산은 소라산(218.1m)으로 여기서 북쪽으로 뻗은 맥이 양주예술대학교를 지나 야트막한 현무봉을 세운다. 학교 건설 과정에서 산맥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현무봉에서 완만하게 내려오는 용맥은 좌우로 굴곡하며 변화를 한다. 용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묘 바로 뒤에는 약간 볼록한 입수도두가 있어 용맥을 따라 전달된 지기를 모아놓았다. 좌우로는 뻗은 선익은 원을 그리듯 묘를 감싸며 앞의 순전과 연결된다. 그 안에 묘가 있으니 혈장의 4요소인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갖춘 것이다. 이들은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 한다. 좌향은 병좌임향으로 북향이다. 우리나라는 기후특성상 남향을 선호한다. 그러나 풍수지리 요건을 갖춘 곳이라면 북향도 길지가 될 수 있다. 이때는 뒷산이 낮아 햇볕이 차단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곳이 그렇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묘역을 다정하게 감싸며 보국을 형성하였다. 정면에 있는 안산은 반달모양이다. 이러한 산에서는 여자가 귀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인수대비가 나온 모양이다. 아쉬운 점은 공장들로 난개발이 심한 점이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경제도 발전하면서 환경도 보전하자는 개념이다. 이는 풍수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현실은 경제 논리가 우선이다. 풍수지리 논리로 환경을 보호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본받아야 할 때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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