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둥치들 사이로 보이는 먼 곳의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선명해지더니만 며칠 새 숲의 모습이 무척이나 수척해졌다. 그 사이 찬바람에도 꽤나 오래 버티던 이파리들이 하나둘씩 떨어지다 이제는 바람이 불라치면 한꺼번에 한 움큼씩 우수수 져버린다. 늦은 오후 시간이면 자주 오르곤 하는 뒷산 풍경인데, 엷게 스치는 바람에도 바르르 떨며 용케 붙어 있는 몇 닢의 단풍 이파리들은 차마 보기에 애잔하기까지 하지만 이마저도 머지않아 모두 작별을 고할 것이다. 그렇게, 늦가을 무서리 내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사이 성큼 겨울이 들어와 앉아 새벽녘엔 예사로 영하의 날씨다. 많지 않은 양이긴 하나 첫눈에다 한 차례 함박눈 구경도 하였으니, 이제 이 겨울 기온의 변화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유리창에 서리꽃 피고 무채색으로 변한 뒷산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얼어있을 상고대를 보는 일만 남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오늘이 한해의 끄트머리인 매듭달의 첫날이다. 여느 해든 세 밑이 가까워 오면 쓸쓸하고 심란한 여운이 돌기 마련이지만, 불과 한 해 전 경주 지진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난 포항의 지진 소식에 놀라서인지, 올해는 유난히도 세상 풍경이 더 어수선하게 느껴지며 심란함이 더하다. 아마도 진앙지(震央地)의 코앞이 내 열여덟까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추억 어린 곳이자, 지금도 형제자매와 가까운 지인들이 살고 있는 고향 땅이라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기상청에서 보낸 지진 재난경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친지와 지인들의 안부를 묻느라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으나, 더러는 통화가 되고 더러는 한 참 동안이나 연락이 닿질 않아 불안했었다. 다행히 몸을 다친 이는 없어 안심은 되었지만, 예측치 못한 갑작스러운 재난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간간이 이어지는 여진이나 지나가는 트럭 소리, 또는 강풍, 심지어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활발해지는 태동에 깜짝깜짝 놀라는, 소위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예사로 볼 일은 아닌듯하다. 그런데 일일이 안부를 물은 후 내가 고작 한 일이라곤 TV 방송의 자막에 나오는 ‘이재민 돕기 성금 모금’ 전화번호를 수차례 연거푸 누르는 일 밖에 한 일이 없다. 허나, 이를 두고 아무도 무어라 하는 이 없건만, 마치 나를 키워 준 고향에 대한 오래된 빚인 양, 한 걸음에 달려가 지진으로 무너진 담장의 벽돌 한 장이라도 내 손으로 치워주지 못함에 마음이 영 불편하기 짝이 없다.

와중에, 59만 수험생의 ‘대학 수학능력시험’ 일자가 천재(天災)로 인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지만, 별다른 변고 없이 연기된 날에 무사히 치러진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하여, 전국의 다른 지역 수험생들의 입장에선 시험연기로 인한 불편함이 컸을 텐데, 오히려 피해지역 학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대견한 신세대란 생각을 하며 그들로부터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와 대게 철이 시작되었으나 직격탄을 맞은 가게들은 순식간에 찬바람만 맞고 있단다. 거기다 정부지원은 집 잃은 사람에 집중되어 상인들은 후순위로 밀려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한숨만 쉬고 있다니, 오늘은 부지런히 이곳저곳 전화하여 시간이 허락하는 지인들을 모아봐야겠다. 주말에 함께 포항으로 내려가 물미역에 솔향기 나는 과메기 몇 꾸러미씩이라도 사다 이웃들에 나눌 수 있다면, 이 또한 힘든 이들에겐 작으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제 12월이 깊어지면서 세모의 풍경들이 다가올 것이다. 당장에 오늘부터는 곳곳에 구세군의 자선냄비도 등장할 텐데 매일처럼 그 냄비가 가득 차, 타는 갈증과 허기져 힘들어하는 이들의 갈한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워주며, 차가운 방에 온기가 돌게 해줄 수 있었으면~ 그래서 그들도 세상은 참으로 따뜻하고 살만한 곳이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정하 중국 임기사범대학교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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