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을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겉으로는 제1야당이지만 이번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보여주지 못해서다. 그 과정에 성과는 국민의당이 얻었고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알려졌다시피 한국당은 당초 정부의 공무원 증원을 절반 이하로 줄이고, 최저임금 지원 관련 예산은 전액 삭감하며, 법인세는 인하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운바 있다. 하지만 잠정 합의 결과를 보면 대부분 민주당 또는 국민의당 주장대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일 비공개 의총에서도 합의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이 봇물처럼 나왔다는 후문이다.

한국당 의원들의 목소리도 다양했다. 한 의원은 아예 작심한 듯 “왜 합의안에 사인을 한 것이냐”고 질책했고, 또 다른 의원은 “우리가 최소한 자유시장경제의 노선 가치는 지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문을 했다. 심지어 의총장에서는 “정우택 원내대표가 협상 결과를 책임지고 물러나라” “협상을 깨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왔다는 것은 한국당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험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새삼 일깨우는 순간들이었다. 물론 정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공무원 증원, 법인세 인상에 대해 의원들도 잠정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개진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결국 어제 의원총회를 통해 공무원 9475명 증원, 법인세 인상 등 여야가 전날 내놓은 내년 예산 합의안에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물론 본회의 불참이나 회의 참석 후 반대표 행사 등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 전략은 다시 논의키로 했지만 처음부터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못한 책임은 면키 어렵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해당일 의총에서도 잠정 합의문에 서명한 정 원내대표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생각하기에 는 한국당과 상관없이 합의문에 서명한 민주당(121명)과 국민의당(40명) 의석 수 만으로도 국회 과반이 되는 만큼 예산안 통과에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그래도 명분을 제대로 남기려면 제대로 된 그 무엇인가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는 판단이다. 어쩌면 지금에 와서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뜻하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리고 있다.

심지어 정진석 의원은 “남 탓할 거 없이 우리는 얼치기 보수였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말대로 공무원 증원과 법인세 인상 등과 관련해 다른 선진국은 다들 공공부문을 줄이는데, 인구감소가 가장 심각한 우리나라만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가고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 말은 세금으로 공무원 일자리를 늘리려면 결국 세금을 더 걷어야 하고, 이는 경제를 위축시켜 일자리 감소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과 다름없어서다. 어찌됐든 한국당의 책임이 크다. 보수정당의 신념과 존재이유는 뒷전이고 보수라고 지칭하기도 부끄러운 한국당이다. 견제세력이 이 정도라면 그야말로 곤란의 지경을 넘어선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하는 한국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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