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본산 어찌 품으랴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 자락에는 회암사지가 있다. 사지(寺址)란 사찰이 있었던 장소로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는 곳을 말한다. 회암사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지공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훨씬 이전부터 절이 있었는데 지공선사와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스리랑카에서 선불교를 수행 한 후 중국으로 넘어와 이를 전파한 후 나옹을 만나 고려를 방문하였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간섭기로 티베트불교의 영향권에 있었다. 승려 대부분이 대처승으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는 등 세속화 되었다.

지공은 고려에 2년7개월 머무르면서, 하루는 선(禪)을 설하고, 하루는 계(戒)를 설하며 고려의 불교를 일신시켰다. 그는 회암사의 산수 형태가 인도 왕실 불교사원인 나란타사와 비슷하게 생겼다며 절을 크게 지었다. 지공이 돌아간 후 나옹은 불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고려불교는 대승불교의 계율관을 갖게 되었다. 대승불교란 자비를 기본적 이념으로 공(空)을 지향한다. 즉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누구든 부처에 귀의하면 성불(成佛) 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나옹선사의 불교개혁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부합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로서 나말여초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비롯된 조계종의 법맥이 다시 복원되었다. 회암사는 불교개혁의 중심에 있으면서 전국사찰의 총본산이 되었다.

우왕 2년(1376) 나옹이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 들렸다가 57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뒤를 이어 제자인 무학이 회암사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왕사가 되어 풍수지리에 대한 자문을 하였다. 이때부터 회암사는 조선왕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태조 7년(1398)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죽였다. 이성계는 자식에게 실망한 나머지 왕위를 둘째인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2년 뒤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성계는 차사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태종은 무학에게 부탁을 했고, 무학은 태조를 설득하여 회암사에 머물게 하였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지로 책봉하였다. 그러자 둘째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하여 회암사에 머물렀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불교를 신봉하며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다. 문정왕후는 아들이 12살의 나이로 제13대 명종으로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녀는 숭유억불의 국시를 무시하고 불교를 크게 장려한다. 승려 보우를 왕사로 모시고 회암사에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유학자들인 관료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종 20년(1565) 4월 8일 회암사에서 대법회를 열어 불교중흥의 완성을 선포하고자 했다. 그러나 법회를 3일 앞둔 4월 5일 회암사에서 목욕재계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사망하고 만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자 그녀 추진했던 정책들 대부분을 폐기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유학자들은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한 후 살해하였고 회암사도 불 살러버렸다. 나옹선사 이후 200년간 전국 제일 사찰의 명성은 사라지고 오늘날까지 폐사지로만 남게 되었다.

회암사의 주산은 천보산(423m)이다. 한북정맥이 포천의 죽엽산과 축석령을 지나 불국산을 향해 갈 때 북쪽으로 천보산맥을 분지한다. 천보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온 맥이 험한 기운을 털고 멈추어 작은 혈을 맺었다. 주룡을 양쪽에서 호위하며 따라온 물이 합수하는 가운데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지(寶光殿址)가 있다. 그 위편에 왕이 정사를 보던 정청지(正廳址)가 있다. 이 두 건물만 기가 모인 터에 위치한다. 나머지들은 물길이거나 비혈지다. 청룡과 백호가 좌우양쪽에서 가깝게 보호해주고, 앞에는 반월 안산이 가로 막아 보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용의 기세도 약하고 보국의 크기도 작다, 또한 보국 밖의 조산들은 바위산으로 험하게 보인다. 그중에는 살짝 고개만 내밀고 이곳을 훔쳐보는 듯한 산들도 있다. 이른바 도적봉이라 불리는 규봉이다. 규봉이 보이면 시기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회암사지는 작은 규모의 절터로 적합한 자리다. 회암사지가 폐사가 된 것은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땅의 역량을 초과하여 건물을 지었다. 건물도 분수를 알아야 한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