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20세기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재판 없는 처형은 없다는 규범을 법률가들이 따랐다면, ...살인과 관련된 서류 작업의 처리를 관료들이 거부했다면, 나치 정권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 행위를 실행에 옮기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던 나치의 친위대가 직접 수행한 것은 실제로 많지 않았다. 대다수는 평범한 공무원, 경찰관들이 한 짓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그들은 흔히 미루어 짐작하듯 나치에 의한 직접적 강압으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다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이익과 남들에게 나약해보이지 않으려는 생각이 어우러져 끔찍한 범죄를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들은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자로 손가락질 받았던 이들의 말과 판박이다.

우리는 요즘 부쩍 지속가능한 사회를 언급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속가능한 사회는 중요한 전제가 따른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공공 조직들이 그들 본연의 기본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전제다. 지속가능성은 ‘기본’에 달려있는 것이다.

공공 조직이 정상 작동하기 위한 기본은 직업윤리다. 직업윤리가 해당 조직의 구성원의 기본적 정서로 깔려있을 때 그들은 그들에게 임무를 준 사회를 배신하지 않는다. 군인이 전투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소방관이 불 속으로 뛰어들기에 앞서 이런저런 계산을 한다면 그보다 허물어지기 쉬운 사회는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 정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GDP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예산 비율을 자랑하지만 기대와 달리 가시적 성과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먹고 살 새로운 먹거리가 나온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벨상을 타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쌓아온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호들갑은 선진국에 결코 뒤지지 않지만 말없이 쌓아온 기초 연구의 역사에서 차이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과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현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정권 교체 때는 물론이고 당국자만 바뀌어도 기존 정책들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니 말이다.

과학기술 정책도 결국 권한을 가진 정치인과 공무원의 손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된다. 만약 그들에게 직업윤리가 투철하지 않다면 스스로 과학에 대한 전문적 경험과 식견이 부족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 모를 것이다. 과학 정책이 동사무소 행정이나 군대 행정과 별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은 의대에 가려고 줄을 서고 너도나도 공무원이 되려고 목을 매고 있다. 별의 별 명칭의 일자리 정책에 예산이 퍼부어진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진작 나와 있지만 진득하게 집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어디선가 혁신이 일어나야만 돌파구가 마련된다는 사실이다. 혁신의 방아쇠는 청년들의 기업가 정신이다. 기업가 정신이 하루아침에 생길 수는 없다. 그러나 오락가락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시작하는 것이 그나마 후회를 덜 하는 길이다.

청년들이 기업가 정신을 가지기 어려운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대한 신뢰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나 스마트 기술처럼 이른바 잘 나가는 분야에 종사하는 젊은 연구자들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불신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 같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십중팔구 자기 잘못은 아니라 할 것이다. 아예 젊은이들의 정신 자세를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핵심이 아니다. 과거 기술의 최전선에서 세계와 경쟁했던 연구개발자들은 직장에서 너무나 쉽게 버려졌다. 반면 공복(公僕)과 면허증 소지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노후를 보장받았다. 누가 젊은이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함부로 운위하는가.

스나이더의 일갈을 한 번 더 경청해보자. ‘권위주의자들에게는 복종하는 공무원이 필요하다.’ 납세자는 왜 공직자와 정치인에게 급여와 지위를 제공하는가. 이 나라의 현 세대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사회를 준비할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직업윤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배임이요 다음 세대에 대한 배신이다. 부끄러움을 잊는 것에 익숙해질 때 우리 사회는 병들어 간다.

정택동 서울대 교수, 융기원 부원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