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 학생이 총기를 난사하여 학생 32명이 사망했던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그 사건의 범인이 우리나라 교포였다는데 충격이 더 컸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로 놀라움 이전에 공범의식까지 갖기도 했습니다.

그 엄청난 충격과 비극을 당한 학교의 학생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사고 이후 학생들은 학교의 잔디 밭에 33개의 돌을 반원형으로 둘러놓고 성조기와 꽃과 추모의 편지를 써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희생자 32명만 추모하는 것이 아니고 가해자 범인도 함께 추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돌의 개수가 33개였던 것입니다.

범인에 대한 추모편지의 내용이 더욱 크게 가슴을 울리게 했습니다.

‘승희야, 난 너를 미워하지 않아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이 세상 모든 이로부터 떨어져 홀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네게 손 한번 내밀지 않았던 나를 용서해 줘. 이제 저 세상에서라도 너를 옥죄었던 고통에서 벗어나 편하게 지내길 바란다.’ -스탠리-

그러면서 스탠리 학생은 인터뷰하는 기자에게

“앞으로는 학교에서 말 없이 홀로 있는 학생을 만나면 끊임없이 말을 걸어 친구로 만들겠습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돌보지 않는다면 이런 끔찍한 사건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요?”라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살인자를 추모하고 오히려 그에게 손을 먼저 내밀지 않았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며 앞으로는 외롭고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먼저 손을 내밀겠다는 말에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잘못이고 인종이나 국가와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범인을 미워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충격적이거나 가혹한 사건을 당해서 흔들림없이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온화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성찰하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헤아리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생존에 대한 불안이 어느때보다 강하게 드러나고 협력과 상생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 사라지고 승자독식의 구도가 정착되어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 하는 현실 상황에서 남의 아픈 곳을 쓰다듬는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회의 흐름은 지적(知的)성장을 지고(至高)의 목표로 삼고 있어 따뜻한 인간애가 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사회심리가 원한이나 좌절 또는 반감으로 집합되고 있어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보은(報恩)과 베풂 보다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사회로 이전되고 있는 듯합니다.

사회가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지식산업이 발달할수록 지능적으로 서로 비판, 비방하고 공격하고 허위와 가식이 일상으로 가득차서 신뢰와 사랑의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기보다 서로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기에 바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의 명분 뒤에는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한 나라안에 사는 사람들인가 싶을 정도의 말의 내용은 막말수준을 한참 넘고 있음을 정치지도자들에게서 봅니다.

또 사건이나 사고를 당하면 냉정해지기가 어렵고 이성적 판단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므로 격앙되고 흥분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공분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매년 50여만 명의 대학을 졸업한 고급인력이 사회로 나가고 있는 지성강국의 우리나라입니다.

지성강국답게 이제 생각이나 마음의 방향을 돌려 역지사지의 마음과 관용과 용서의 흐름으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인간다움을 만드는데 실패하지 않고 지식의 발전이 인간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용서가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한 범죄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며 용서해달라는 한 대학생의 말이 큰 울림을 줍니다.

용서와 관용과 사랑은 살아있는 자만이 베풀 수 있는 특권입니다.

유화웅 시인·수필가 (사)굿파트너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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