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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김봉길 U-23 축구대표팀 감독 "아시안게임 2연패 '봉길 매직'은 계속됩니다"

싫은 소리 못하는 덕장…2018년 한국축구 포문열다

조현진 chj@joongboo.com 2018년 01월 09일 화요일

김봉길(52) 감독과의 만남은 제주도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4일 저녁에 진행됐다. 카페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첫 인사와 함께 “뭐 드실 건가요?“라고 물으며 소박한 웃음을 지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피곤한 일정에 붉게 충혈된 눈. 그 사이로 번지는 선한 미소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을 위해 중국 출국을 앞두고 이발을 하고 왔다는 그는 국가대표 감독보다는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편안했다.

-제주도 전지훈련은 어땠나.

“1차는 창원에서 진행됐다. 제주도 훈련에는 각자 프로팀이나 해외에 있던 선수들이 참여해 사실상 본격적인 훈련이었다. 예전에는 공을 두고 뛰는 훈련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축구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가지고 팀워크를 높일 수 있는 체력적인 훈련을 진행했다. 선수들의 조직력을 극대화하는데 주력했다.”

-선수들은 잘 따르는가. 어떤 감독인가.

“선수들 이야기를 잘 수렴하는 편이다. 질책보다는 평가로서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다. 엔트리는 정신적으로 근성이 있는 선수들을 위주로 선발했다. 선수들이 프로시즌을 마치고 휴가기간이다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컨디션이 좋아져 식당에서 시끌시끌했다.”

-선수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안 해서 덕장이라고 하던데.

“선수들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사람한테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데 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상대도 보여주지 않는다. 권위를 버리고 다가가려고 한다. 축구는 개인플레이에 치중하는 순간 팀의 패배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화합을 이끌어내는 팀플레이가 중요하다.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개인이 빛나려면 팀이 잘돼야 하고 팀을 우선시하라고 말한다. 그라운드에서 튀려고 하면 자제를 시킨다. 나도 화를 잘 내진 않지만 한 번 내면 선수들이 놀라게 낸다.”

-가장 최근 화를 낸게 언제인가.

“그게… 기억이 안난다.(웃음) 내가 화를 안 내는건 아니다. 화를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낼 때호되게 하지 않나. 훈련할 때 게을리 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크게 혼을 낸다. 선수들이 놀랄 정도다.”

-국가 대표팀의 AFC 챔피언십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여러가지 방면에서 시험대가 된다. 우리선수들의 기본기는 확인을 했고 본 시합에서 얼마나 활약하는지 평가할 수 있고 다른팀의 전력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목표는.

“8월 아시안게임 2연패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챔피언십은 그 과정이 될 것이다. 단일팀은 꾸준히 선수들을 관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열흘이면 열흘, 2주면 2주, 이렇게 한시적으로 모이니 짧은 시간에 기량을 얼마나 극대화시키는지가 승패를 좌우한다.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챔피언십이 끝나면 구단마다 차출을 요청하고 시즌중이라 들어오지 못하는 해외 소속 선수들의 활약도 꾸준히 체크해야한다. K리그도 계속 볼 계획이다.”

김 감독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대표팀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이야기할 때는 선수들의 마음까지 살뜰히 챙겼다.

아쉬운 점이 거론되면 “내 탓이오"”라는 자세로 받아들였고 잘하는 부분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장점”이라고 했다.

살아온 환경이 궁금했다.

거친 운동을 하면서 내면의 따뜻함을 계속 품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을까.

-축구에 처음 입문한 계기는 무엇인가.

“부평동초등학교 3학년 때 점심시간에 공놀이를 하는데 축구 감독님이 축구실로 부르시더니 축구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당시 공을 차는 게 너무 좋아서 한 번에 승낙을 했는데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막내 아들이다보니 힘든 축구를 왜 하냐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훈련했다. 부평동중에 입학한 해가 79년인데 그때 당시에 전국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서울에 있는 다른 중학교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니 인천에서 타지역으로 선수들을 보내는 게 아깝다며 내가 있던 학교에 축구부를 창단했다. 부평고 진학 뒤에는 전국대회에서 3번 우승을 하니까 축구부를 만들어주더라. 공교롭게 내가 옮길 때마다 축구부가 생겼다.”

-그럼 학창시절 선배들이 없었겠는데.

“끌어주고 당겨주고 하는 선배들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지역에서 축구부 창단 멤버였기 때문에 위로 선배가 없었다. 학연, 지연, 혈연.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나를 알리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내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야했다. 그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던 기억이 난다.”

-선수로서의 프로 생활은 어땠나.

“연세대학교 4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고 프로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유공코끼리와 전남드래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오히려 순탄했는데 프로에 오면서 체력적인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고전을 많이 했다. 소속팀에서 주전선수였는데 전반기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라는 벽에 부딪혀 골을 넣지 못했었다. 10년간 선수생활을 끝으로 은퇴하고 1년 동안 브라질에 지도자 수업을 받으러갔다.”

-이후부터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는가.

“모교인 부평고에서의 감독이 지도자로서 첫 출발이었다. 이후 전남에서 총감독으로 있던 허정무 감독님의 연락을 받고 수석코치를 맡았다. 허 감독님은 스승이자 지도자의 길을 가르쳐준 분이다. 인천유나이티드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허 감독님 밑에서 코치를 했고 감독대행을 두 번 맡았다. 감독대행을 한 사람이 감독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나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케이스다.”

-그 때 ‘봉길매직’이라는 별명을 얻지 않았나.

“2013년도에 상위 스플릿에 진출하면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아직도 쑥스럽다. 당시 10경기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하지 못했는데도 서포터즈들이 한결같이 지지해줬고 그래서 더욱 미안한 마음이 컸다. 상주전에서 첫 승리를 한 날이 기억난다. 성적이 좋지 않은 팀들의 팬들은 구단의 버스를 가로막고 항의성 시위를 한다. 우리 버스도 가로막았는데 팬들이 나보고 내리라고 하더라. 팬들이 승리를 기뻐하며 감독님 얼굴 한 번 보자고 요청했다더라. 내려서 팬들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지해준 팬들에게 고마웠고 감독으로서 1승이 이렇게 값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들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를 한다고 들었다.

“FC안양 김신철 선수가 큰 아들이다. 고정운 감독은 또래고 홍명보, 황선홍 감독은 후배다.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오니까 우리 애들한테는 친숙한 삼촌들이었다. 삼촌들이 TV에 나오니 우리 애들한테는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아들이 어느 날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길래 축구만 하면 유명한 사람이 되는 줄 아느냐며 반대했다. 어느 분야나 어렵겠지만 축구는 힘든 스포츠다. 한 번은 축구를 시키지 않으려고 유니폼과 축구화를 숨겨뒀더니 울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인데 아빠는 그럼 왜 축구를 하냐’고 하더라.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며 손을 들었다.”

-가정에는 몇 점짜리 아버지라고 생각하는가.

“2012년도 감독시절 둘째 아들이 몸이 좋지 않아 3년간 고생했다. 내가 가정에 소홀히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원정경기나 합숙, 전지훈련 등으로 항상 밖으로만 다니는 직업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많이 주면 30점? 이마저도 안 될 것 같다. 표현을 잘 못하는데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다. 100점 받기가 쉬운 삶은 아니다.”

-그래도 축구계에서는 성공한 인물이지 않나.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헝그리 정신이 있었다.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났고 흔히 말하는 백(Back)도 없었다. 당시 고향에서는 야구가 인정받던 시절이라 오로지 실력으로 살아남아야했다. 독하게 훈련했고 노력했다. 남들보다 두배 세배 했다.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간절함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합숙기간이라 병환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살아가면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니가 병중에서도 학교로 몰래 찾아와 담 너머로 내가 운동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하시더라. 국가대표가 됐을 때 국가대표 감독이 됐을 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어려운 환경에서 포기할 수도 있었을텐데 대견하다.

“축구를 너무 사랑했다. 가정이 어려워서 성공은 하고 싶은데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었다. 축구는 자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 좋은 날이 오지 않겠나 생각했다. 청소년 대표에서 연세대에 입학하고 국가대표가 되고… 이렇게 하나씩 할 때마다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뜻하지 않게 부상을 당하고 슬럼프에 빠졌었다.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이외에는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매달렸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축구인들끼리도 우리 축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제도가 개선되고 지도자가 노력해야하는 부분도 있다. 예전에는 축구 전용구장이 없었는데 지금은 좋은 잔디에 미디어의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있지 않나. 선수들이 조금만 더 간절하고 개인적인 노력을 하면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는 고추장, 된장의 근성이 있다. 기술적인 부분들은 예전보다 업그레이드됐다. 여기에 정신력이나 근성에서 강한 면모를 갖추면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개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나이가 먹어서도 대표팀 감독이나 프로팀 감독, 유소년 감독이든 지도자로서 살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서 여기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축구에 대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 축구로 받은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목표다.”

조현진기자/chj@joongboo.com

사진=윤상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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